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글입니다 어디서 퍼왔는 지는 말 안 할래요.


사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보고, 혹은 단 한 편만 보고, 그의 영화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읽어서 남의 깨달음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 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건 에이젠쉬테인이나 오손 웰즈를 본 다음 할 말이다. 누구나 처음 오즈를 보면 좀 어리둥절해진다. 거의 리듬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일정한 길이를 유지하면서 흘러가는 쇼트들, 혹은 어느 쇼트도 갑자기 명 장면이 되어 숨을 멎게 할만큼 그 스스로의 존재감을 갖지 않고 그저 거기 인물들 앞에, 집안에, 그 안에서 창문을 걸쳐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면서 멈춰 서 있는 듯한 카메라, 거의 표정이 없는 인물들이 짓는 미소, 혹은 기어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얼굴, 일정하게 톤을 유지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거의 들여다 볼 수 없을 만큼 고정된 목소리,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어떤 반전도 허용하지 않고 예정된 수순을 따라가는 줄거리, 그 앞에서 그 무언가를 잡아냈다면 이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오즈의 영화가 주는 위대함은 그 어느 쇼트에, 혹은 그 어느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화 전체 오십 네 편의 흐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오즈의 위대함은 그것을 그 형식에로 환원시키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 위대함이 보이지 않는 초조함 대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 안간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즈가 무릎을 꿇고, 후지 필름으로, 동일한 등장인물을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시종일관 50미리 표준렌즈로, <늦봄>에서의 자전거 타는 하라 세츠코를 보여준 이후에는 그의 마지막 영화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카메라를 이동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앉혀놓고, 혹은 세워 놓고, 180도 시선 나누기를 포기한 다음, 360도 원형 상상선을 그어서 카메라의 위치를 옮겨 가면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은, 오즈의 영화가 지니는 기괴한 측면이지 그것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설명이다. 만일 그 말이 성립된다면 오즈의 무성영화들은 모두 실패했다고 말해야만 한다. 하지만 오즈의 무성영화들이 보여주는 그 우아 한 이동촬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혹은 저 위대한 세 편의 <...했지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 <태어나기는 했지만>은 (문제의 그 단절을 보여주는) <늦봄>에도 비견할만하다. 혹은 <비상선의 여자 >는 적어도 <피안화>보다는 좋다. 그리고 나는 1934년에 만든 <부초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를 다시 찍은 59년의 <부초>보다 (그 등대 앞에 놓은 맥주병의 첫 장면만을 예외로 치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1942년에 찍은 < 아버지가 있다>는 어떻게 할 참인가? 그러니까 <늦봄> 이후의 오즈만을 보고 그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절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오즈의 위대함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오즈가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 혹 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인용했던 말, “두부 집에서 돈까스를 만들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는 말은 사실상 오즈가 세상을 떠난 다음 그의 영화를 설명하려드는 시도에 대한 유언과도 같은 충고이다. 나는 이 말 을 듣는 순가 그 어떤 오즈에 대한 설명보다도 거기 핵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전통과 모던, 두 개의 일본, 전쟁 전과 전쟁 이후, 하지만 ‘하여튼’ 그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이상한 슬픔이 감돈다. (이 말의 방점 은 ‘하여튼’이다. 이 표현은 매우 잔인한 말이다) 왜냐하면 두부 집은 결국 사라져가면서도 그 집은 살기 위해 돈까스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즈가 헐리우드 영 화에서 가져온 엎치락뒤치락 희극 코미디에서 시작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세상과 영화 사이의 불편함을 보았다. 그건 단지 영화 안의 형식이 아니라, 바뀌어 가는 세상의 질서들이 안겨주는 삶과의 불일치에서 오는 것이다. 오즈에게서 중요한 것은 카메 라의 위치나 편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음식을 차려 놓은 밥상과, 술잔과, 주전자와, (서양에서 들어온) 스포츠(특히 야구)와, 파칭코와, 장기와, 가게의 간판과, 그것이 늘어선 긴자나 이께부꾸로, 마루노우치의 비즈니스 센터, 병원과, 공장의 굴 뚝과, 기차와, 방안의 텔레비전과, 전화와, 시계와, 그 소리들에 있다. 오즈는 그것들이 영화 안으로 들어와 등장인물들과 함께 살아야하는 그 어쩔 수 없는 불편함에 감정을 안겨주려고 한다. 거기에는 이상할 정도의 자포자기가 있다. 그것이 슬프다. 그 감정을 환유하는 것은 딸의 결혼식이다. 그 결혼식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이제 혼기가 되었으므로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것이다. 그걸 아버지가 막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슬프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떠나간 것들은 딸이 이제 채우지 않아 텅 빈 주전자처럼 슬프게 저기 놓여있고, 없던 자리에 새로운 것들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다. 그 사이에 마치 시간은 멈춘 것처럼 하늘은 항상 맑고, 그래서 기후의 변화가 거의 없는 오즈의 영화는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게 만든 다. 그러니까 오즈에게서 (59년의 <보초>를 예외로 하면)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비가 몰아치거나 안개가 쏟아져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것은 상사할 수 없는 일이다. 구로사와가 세상을 뒤흔들어보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고 탄식하는 동안, 오즈는 그 세상을 멈추어보려고 그렇게 조용히 앉아있어도 결국 시간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음을 슬프게 인정하고야 만다. 오즈는 이것을 하나의 질서로 만들기 위해 일단 멈추어 선다. 그리고 돈까스 집이 되어 가는 일본을 ‘하여튼’ 살아보려고 한다. 사실 오즈 영화에서 이상하게 인상적인 것은 오즈의 아이들이 모두들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거나 가벼운 병이 아픈 쇼트만 있다는 점이다. 그 아이들은 그 어머니의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아버지와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다. 혹은 그 딸들은 아버지가 올라올 수 없게 계단이 없는 이층에서 지낸다. (오즈의 영화에는 딸의 방에 올라가는 계단을 찍지 않았다는 히스미의 저 무서운 지적!) 오즈의 영화는 그 모든 것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만든 영화들이다.

그러니까 오즈를 척 보고 난 다음, 위대하다고 말하면 그건 오즈를 슬프게 만드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오즈는 실패한 것이다. 그 반대로 자꾸만 돌아볼 때, 오즈의 영화는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안장되고 멈추어버린 듯 했던 모든 것들이 점점 불편해지는 영화이다. 이를테면 <동경 이야기>의 가장 큰 사건은 할머니의 죽음이다. 그런데 정작 오즈는 할머니의 죽음을 찍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늘 창문 앞을 지나가는 이웃집 아줌마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할 때 그 예의바르 고 단조로운 할아버지의 대답을 통해서 알 뿐이다. 혹은 <꽁치의 맛>에서 온통 관심을 기울인 딸의 결혼식을 정작 오즈는 찍지 않는다. 다만 피로연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를 볼 뿐이다. 그것을 절제라고 설명하는 것은 오즈를 오해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오즈는 그렇게 만들어서 딸의 결혼 전 전체와 결혼 후의 씬을 연결하는 그 대목을 송두리째 생략한 다음 그냥 이어 붙인 것이다. 그건 그렇게 붙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연결한다. 그 대신 동일한 쇼트가 다시 되돌아온다. 오즈는 같은 자 리에서, 같은 구도로,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찍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장면 안에서 결국에는 없는 것을 본다. 이에 할아버지 곁에 더 이상 할머니는 없다. 아버지 곁에 딸은 더 이상 눕지 않는다.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오즈의 영화에 서 계절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즈는 이 모든 것을 순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 제목에는 그렇게 많은 계절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계절의 제목 중에 일년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겨울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오 즈 자신은 농담처럼 겨울에는 영화를 찍기 너무 힘들어서 안 찍을 뿐이다, 라고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장소로 귀결한다. 그 곳은 집이다. 말하자면 오즈에게서 펼쳐진 집은 하나의 우주이다. 그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문 곁에서, 정원을 향 해 열어놓은 마루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딸이(정말 오즈의 집에서는 그걸 알 수가 없다) 자기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층에 올라간 것을 탄식하면서, 마치 자기 자신에 말하듯이 서로에게 말하는 정면의 카메라 앞에서, 결코 손 댈 수 없는 외로운 존재들의 360도 편집의 순열에 따라, 그 자리에 붙잡힌 듯이 앉아서 그 순환을 받아들이는 우주의 존재론이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작은 우주가 순환하고, 그의 오십 네 편의 영화 속에서 커다란 우주가 순환한다. 그 모든 것이 얼핏 그렇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거기 그렇게 놓여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순환한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없어지면 없어진 대로, 그러나 그 안에서 하여튼 살아야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즈는 그 슬픔을 찍는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결국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만일 오즈를 보면서 여전히 그 불편한 형식 때문에 감탄을 한다면, 아직 당신은 더 살아야 한다. 당신이 저 정말적인 외로움 안에서, 그 형식의 쓸쓸함 으로 인하여, 거듭 되돌아오는 텅 빈 쇼트들 속에서, 결국 마주치고야 말 산다는 문제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오즈는 정말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 것. 그리고 당신이 차 맛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실 것. 오즈의 말을 흉 내내자면 찻집에 와서 제발 그 차를 커피 마시듯이 마시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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