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s6klHOZ4dw&t=438s



https://www.youtube.com/watch?v=1xvATczF7uo


深呼吸  

 

ハナレグミ

作詞  : 永積崇

作曲  : 永積崇

 

みた 未来 ってどんなだっけな

さよなら

昨日 のぼくよ

 

見上 げた 飛行機雲

ぼくはどこへ ろうかな

 

かくしたものなどないのかな

さよなら

昨日 のぼくよ

 

じて んでみる

いつかの える

 

おーいおい

おぼえてるよ

おーいおい

わすれないよ

 

かがぼくを んだような

くけど はいない

 

おーいおい

おぼえてるよ

おーいおい

わすれないよ

 

 

おーいおい

ぼくがぼくを じれない

だけはぼくのこと

じてくれていた

 

みた 未来 ってどんなだっけな

hello again

明日 のぼくよ

 

手放 すことはできないから

あと 一歩 だけまえに

あと 一歩 だけまえに

あと 一歩 だけまえに



https://www.youtube.com/watch?v=ApAsj4HVGCg







다음 글은 『여배우들』 (한창호 지음, 어바웃어북, 2015)에서 하라 세츠코에 관한 글만을 옮겨온 것입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퍼가지는 마시고, 문제가 될 시 연락주시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원래는 '씨네 21'에 연재되었던 글이라고 하네요. 


찾아보니까 웹상에 올라온 글이네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686422.html





신화가 된 스타의 삶


 

종종 스타의 신체적 태도는 그 자체로 한 국가의 문화가 되곤 한다. 이를테면 존 웨인의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태도와 미국 문화의 천연성을 떠올리면 되겠다. 설사 그것이 신화라고 할지라도 역설적이게도 신화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그렇다면 전후 일본 문화에서 하라 세츠코(1920~)의 의미는 신화라고 말할 수 있다. 미인이고, 품위 있고, 겸손하고, 희생적인 하라 세츠코의 이미지는 전후 일본 문화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은 그 이미지에 반했고, 지지했으며, 더 나아가 세상의 관객도 하라 세츠코의 스타성에서 일본 문화의 품위를 읽는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말대로 신화는 대게 사실을 압도하고, 그렇다면 신화의 주인공이 된 하라 세츠코는 영원히 영화의 기억 속에 남을 흔치 않은 배우가 된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그녀

 

하라 세츠코는 패전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를 반성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표방할 때 스타로 우뚝 섰다. 쿠로사와 아키라(1910~1998)<나의 청춘에 후회는 없다>(1946)를 통해서다. 여기서 하라 세츠코는 파시즘에 저항하는 좌파 지하운동가의 아내로 나온다. 군부가 이데올로기를 독점하여 총칼을 휘두르던 그때에, 운동가와의 결혼 자체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 용감한 결정이었다. 남편이 옥사한 뒤 하라 세츠코는 매국노의 가족이라는 이웃들의 폭력적인 배척 앞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더욱 꿋꿋하게 홀로 된 삶을 개척해 나간다. 굴복하지 않는 그 삶이 마치 군국주의의 천박한 폭력에 저항하는 품위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고귀한 희생으로 비쳤다. 어느덧 하라 세츠코에겐 품위, 희생, 고결함 같은 이미지가 각인됐고, 하라 세츠코는 시대의 상징 같은 존재로 우뚝 선 것이다. (일본영화 이야기사토 다다오 지음)

 

하라의 신화는 오즈 야스지로(1903~1963)를 만나며 더욱 꽃핀다. <만춘>(1949)을 통해서다. 하라의 경력은 오즈와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만춘>은 그의 배우 경력에서 큰 전환점이 된다. 이때부터 하라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아버지와 딸에서의 역할이다. 오즈 드라마의 중심에는 늘 양보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조돼 있는데, 그 맞은편에는 만약 그 양보를 누군가 해야 한다면 자신이 먼저 하겠다는 딸의 희생이 뒤따른다. 항상 맑게 웃는 얼굴에, 약간 고개를 숙이고 말하며, 할 말을 상대에게 양보하는 듯한 작은 목소리, 그리고 감사의 마음에서 흐느끼는 울음까지, 하라의 모든 태도는 일본인(특히 여성)의 모범이 됐다.


하라가 며느리로 나오는 <도쿄 이야기>(1953)아버니와 딸의 변주다. 여기서 하라는 전쟁 미망인이다. 시부모가 도쿄에 오랜만에 여행을 왔는데, 의사 아들 부부와 미장원을 경영하는 딸 부부는 바쁘다는 등의 이유로 부모를 거의 방기하다시피하고, 이젠 남편도 없어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며느리 노리코(하라 세츠코)가 시부모늘 가장 따뜻하게 맞이힌다는 내용이다. 혼자 사는 노리코가 방 하나짜리 서민 아파트에 시부모늘 초대하여, 가난하지만 따뜻한 밥상을 정성스럽게 차려내는 장면은 아버지와 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다.

이런 역할, 곧 겸손하고 희생적이며 품위 있는 여성은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친 과정일 수 있다. 그래서 일본 누벨바그의 후배 감독인 이마무라 쇼헤이(1926~2006)은 오즈의 세상을 거짓이라고 비판했다. 이마무라 영화에서 보듯, 패전국 일본엔 추악한 생존경쟁이 난무했지 배려하고 양보하며 서로 사랑하는 인물은 구름 위에 존재하는 이상형이라는 것이다. ‘거짓이고 이상향인데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 곧 신화인데,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그런 믿음을 이끌어낼 가공하 인격을 가졌다는 증거일 터다. 말하자면 스타에겐 사실 여부보다 사싱ㄹ 넘어서는 신화적 서겨이 더욱 중요한데, 하라 세츠코에겐 있었다.


 

나루세 미키오의 그녀


대가족의 딸인 하라는 영화계에서 일하는 형부의 도움을 받아 10대 때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이 전쟁으로 동아시아를 비극으로 몰아넣을 때, 하라는 뛰어난 미모와 정갈한 인상으로 단번에 주목받은 배우로 성장한다. 노골적인 친나치, 군국주의 작품인 독일-일본 합작영화인 <사무라이의 딸>(1937)에서 하라는 전통적인 일본 여성을 연기하며, 미래의 스타로 이미 주목받았다. 열일곱 살 때다.


오즈와의 협업(모두 여섯 작품)으로 영원한 처녀라는 별명까지 들으며, 하라는 청순하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힌다. 이때 만난 또 다른 거장이 나루세 미키오(1905~1969)이다. 그와는 두 작품, <>(1951)<산의 소리>(1954)를 찍었다. 오즈와의 작품에서 아버이와 딸의 관계가 강조됐다면, 나루세의 작품에선 여성 그 자체가 강조된다. 곧 오즈의 여성이 순종적이라면, 나루세의 여성은 독립적이다. <>에서 하라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 연애결혼을 했는데(그런 결정이 당시에는 특별한 것이었다), 철없는 남편은 여전히 총각처럼 살고 있고, 그녀는 부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점점 지쳐가는 아내 역을 맡았다. 하라는 오즈의 여성처럼 화사하게 웃기보다는 도쿄에서 독립할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의지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한 오즈의 딸으 결과적ㅇ로 전통의 질서 속으로 통합된다면, 실존의 주체로서의 나루세의 여성은 관습적인 가치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의 결말은 어쨌든 가족으로의 귀속으로 봉합되는데, 종종 나루세의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산의 소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여기서도 하라는 철없는 남편과 의미없는 일상을 반복하는데, 그럼에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건 시부모, 특히 시부의 사랑 때문이다. 말하자면 <도쿄 이야기>의 관계가 변주된 것인데, 결말부에서 하라는 자신의 삶을 찾아, 시댁을 떠나는 결정을 내린다. 시부와 며느리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이별하는 마지막 장면은 하라가 보여준 최고의 슬픈 연기로 남아 있다. 전통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만, 그 순간에도 겸손, 예의, 품위, 희생 같은 하라의 개성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다. 하라의 캐릭터는 이미 신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하라는 오즈가 죽은 1963년 갑자기 은퇴했다. 그러고는 그레타 가르보처럼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감독과의 남다른 관계 등에서 상상되는 여러 은퇴 이유들이 제기됐지만, 하라는 기자회견에서 배우란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고, 생계를 위해 일했다고만 말했다. 그러고는 오즈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가마쿠라에서 은둔을 시작햇고, 그 생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마 가르보도, 그리고 하라도 요절할 수 밖에 없는 스타의 운명을 긍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은둔하는 그때, 이미 배우로서의 삶을 모두 소진한 운명 말이다



 

 

호평 일색인 영화인지라 무척 기대를 하며 봤는데요... 저로선 그닥 와닿지 않는 영화네요.

사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도 별로 재미없게 봤습니다. 성격적 결함이나 의지력의 부족등의 이유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망쳐버린 사람들에 대해 제가 전혀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일겁니다. 특히 스스로 택한 육체적 학대가 한 사람의 몰락을 가져오는 경우는 더욱더. 가령 술쳐먹고 담배펴서 각종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인생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 느껴져요. <레슬러>의 그 레슬러가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인지라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어떤 열정으로 인해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파멸로 돌진하는 사람들의 인생에서 누군가는 숭고함을 느끼나 본데 제게는 그냥 코미디일 뿐이에요.

 

 그 파멸이 <블랙 스완>처럼 예술혼을 불태운 결과라면? 글쎄요... 제겐 레슬러의 파멸과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하다못해 <레슬러>에겐 중년의 고단함과 망가진 인생에 대한 회한이 어떤 보편적인 울림을 가지기라도 했지요. 전 기본적으로 예술가의 고뇌같은 것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표본수'에 관한 문제입니다. 니나 같은 류의 예술적 고민에 싸인 인생이 세상에 몇 %나 될까요? 게다가 고급예술의 대명사인 발레잖아요?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섬세하고 천재적인 재능의 예술가가 파멸에 이른다는 소재는 예술 영역에서라면 고전적인 주제일지 모르겠지만, 저같은 둔한 일반인에겐 어떠한 일상의 감각도 느낄 수 없어 공허하게만 들릴 따름입니다..........  아.. 제가 요즘 먹고 살기가 힘든가봐요. 이렇게 각박해진걸 보면...

 

결정적으로 <블랙 스완>은 너무 익숙해서 지루한 느낌이었습니다. <퍼펙트 블루>를 본 게 한 대충 10년전쯤 인 거 같아요. 나탈리 포트만이 유명한 '시오니스트'라는 사실도 쫌 불편했구요. <레퀴엠>같은 현란한 편집을 기대했는데 그냥 평범하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여튼 <블랙 스완>은 제겐 대체로 심심하고 진부한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간만에 아침에 일어났더니 안 하던 짓도 하게 되는군요. 영화보고 낙서하기. 영화는 간밤에 봤습니다만...

Director: Darren Aronofsky

http://www.imdb.com/title/tt0947798/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058

 

 

(2011.03.09)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제 개인적인 취향과 달리 류승완의 영화들은 대부분 극장에서 봤습니다. 이 영화에 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극장에서 보아야겠다고 생각했구요. 하지만 한편으론 어색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류승완은 뭔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잖아요. 탄탄한 시나리오나 복잡한 스토리, 현란한 말빨과도 거리가 있는 사람이구요. 특정 장르의 영화를 감독하는데 대단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가 사회와 제도 같은 것을 2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낼만큼 진지하고 비판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부당거래>는 대단한 영화더군요. 사법기관과 경찰조직에 대한 직업적 묘사가 실제와 얼마나 유사한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적으론 굉장히 박력있게 묘사됩니다. 조폭부터 청와대에 이르는 거대한 그림도 뭔가 '핵심을 찔렀다'는 설득력이 있구요. 다들 짐작은 하고 있던 그들만의 더러운 커넥션을 보란듯이 까발리는 데에는 통쾌감도 느껴집니다. 저런 식의 결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의 결말도 크게 다를 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구요. 다소 오버하는 듯한 음악도 스피디한 전개와 어울려 경쾌한 리듬감을 만듭니다. 한마디로 멋진 영화였어요!

 

류승범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양아치 느낌이 강해서 싫어하는 배우였는데, 의외로 '검사'라는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군요. 아마도 제가 '검사'라는 인간들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양아치'라는 인간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큰 차이가 없어서겠지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류승범이 "대한민국 검사를 어떻게 보고..." 따위의 좆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눈알을 부라릴 때, 뭔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법이고 정의고 싹 무시하고 자기 욕망대로 움직여도 결국엔 '승자'로 살아남잖아요. 저런 식으로 살 수 있다면 산다는 게 졸라 신나지 않겠어요? 씨발... 

감독 : 류승완

 

(2010.11.04)

 

 

 

 

 

전 이 영화를 최적의 조건에서 감상했습니다. 관객이 저말고는 아무도 없는, 12시 25분에 시작하는 심야상영으로 보았거든요.

 

전 겁도 꽤 많아, 영화를 혼자 봐야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냥 집에 돌아갈까... 결국 뭔가 자신을 '단련'하자는 각오로 보았습니다.

 

근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굉장히 안 무서운 영화였거든요.

 

영화 내용에 과도하게 감정이입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줄곧 "저건 영화야."라며 자기암시를 했던 때문일까요. 뻔한 트릭과 단순한 설정, 평범한 연기, ... 밤 열두시에 큰 극장에서 혼자 봐도 될만큼 심심한 영화였어요...

 

 

라고 말하면 뻥일지도 모르겠군요. 마지막 10분쯤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인만큼 마지막 시퀀스는 꽤 으시시합니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바꿔놓은 극장판 엔딩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한심한 느낌이더군요. 동영상 파일로 확인한 오리지널 엔딩이 훨씬 그럴듯합니다.

 

 

 


 

 

 

여튼 대체로 실망인 영화였습니다.

 

 

아... 졸라 오랜만의 낙서였습니다. 사는게 바쁘다보니 영화도 거의 못 보내요. 아직 <아바타>도 못봤어요...

 

Paranormal Activity 파라노말 액티비티 ★★★

Director : Oren Peli

imdb

 

 

 (2010.02.02)

 

 



Tokyo Sonata 도쿄 소나타 ★★★

감독 : 쿠로사와 키요시 黑澤淸

naver     imdb

 

쿠로사와 키요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이긴 하지만, 글쎄요... <도쿄 소나타>는 그닥 재밌지 않더군요. 평범하고 안전합니다. 일탈로 치닫던 가족들은 최후의 선을 결코 넘지 않고 회복불가능할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습니다. <헤이세이 무책임 일가, 도쿄 디럭스> 정도로 막 나아가기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싱거울 필욘 없잖아요? 그러고보면 키요시의 공포영화들은 금방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듯 절망적인 결말인 반면, 안 공포영화는 대체로 희망적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군요. 심지어 <인간실격>에서처럼 주인공이 죽어도 말이죠. 이 간극이 뭘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키요시의 영화에서 보고 싶어한 건 아닙니다. 압도적인 절망감에 휩싸여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다! 는 게 키요시의 영화에 대한 저의 이미지거든요. 한마디로 <도쿄 소나타>는 너무 심심한 결말이었어요.

 

하지만 그 심심한 결말을 향해 진행되는 영화의 모양새는 제법 공포스럽습니다.  색감이 부족한 실내 혹은 주택가의 풍경은 <절규>의 짓다만 건물들처럼 황량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묘하게 생동감 없는 인물들은 좀비처럼 비척대며 왔다갔다 하고 키요시 영화의 인물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어느 순간 갑자기 설명하기 힘든 돌발적인 행동이라도 할 듯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자, 이쯤 되면 귀신 한 마리가 등장해주셔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데... 안타깝게도 안 나와주시는군요.

 

사실 키요시는 가령 그 구직센터의 어두운 계단 장면 같은 것을 뭔가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하게 묘사할 작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직난이 일본보다 훨씬 더 한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닥 절망적일 것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도쿄 소나타> 의 가장에게 닥친 문제는 뭐랄까, 중산층으로서의 '품위'가 유지되기 힘든 것이지 생존 자체의 위험은 아니지요. 눈을 낮춘다면 초라할망정 한 가족 건사할만한 직장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 모든 소동 끝에 결국 그 가장이 새로운 업무를 "프로의 방식 やり方"으로 해나간다는 결말에 이르면 허무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기업 관리직이었던 사람이 쇼핑몰 청소부가 되는 과정이 그렇게 지난하고 공포스런 몰락인가요? 음... 글쎄요... 한번도 작정을 하고 구직을 해 본 적도, 그리고 남보란듯이 폼나는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도쿄 소나타>에서 가장 공포스런 부분은 세계 평화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큰아들의 황당한 인식체계입니다. 뭐 이런 병신같은 놈이 다 있는지... '미국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런 미국을 도와, 구체적으론 미군으로 입대하여 중동에 파병되는 것이 일본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는 것'이라는 소리를 해댑니다. 일본의 젊은 것들은 정말 저렇게들 생각하고 있나요? 혹시 우리나라 젊은이들 중에도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들이 있나요? ... 저런 황당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입대하겠다는 큰아들의 선택에 수긍하게 되는 건 다음 한마디 때문입니다. "미국은 관두고 일본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큰아들은 되묻습니다. "뭘 하면 좋은데? (일본에서) 뭘 할 수 있겠어? 何をやればいいんだよ?"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미군이 다른 국적의 젊은이들의 입대를 허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모병을 한다면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직업군인으로 입대할 한국의 젊은이들이 꽤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대체 이놈의 나라에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무슨 이유를 들어 그들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

 

반가운 얼굴이 많이 나옵니다. 코이즈미 쿄코는 엄마로서도 환상적이시군요. 쿄코 여사는 <텐텐>에서도 엄마(?)역할을 하시더니, 이젠 엄마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된 건가요? 이가와 하루카(재일교포라는군요...)는 최근에 얼굴에 메스를 대었나요? 인상이 조금 바뀐 듯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야쿠쇼 코지도 나와주시는데... 허허... 그냥 웃지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큐어>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만큼이나 무서운 대사더군요. 그래, 당신은 뭘 잘하십니까?

 

피아노에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태어난 소년이라니... 키요시 영화에서 일상성을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이 무슨 뜬금없는 설정이란 말입니까?  (2009.07.10)

 



마더 ★★★★

감독 : 봉준호

 

보는 내내 '영화, 정말 잘 만드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흠잡힐만한 건덕지가 하나라도 있던가요? 어떤 영화도 완벽한 만듦새로 찍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봉준호라는 이름이 제겐 거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수준의 신뢰감을 주는군요. 어여 <설국열차>도 완성해주시길...

 

먼저 보고 오신 제 어머니가 결말을 홀랑 말해주신 바람에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갔습니다만, 직접 보니 모성애니 가족애니 하는 끈적거리는 단어가 더욱 징글맞게 느껴졌습니다. 모성이 갖고 있는 위험하고 비열한 일면을 목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경험이더군요.  <마더>가  <괴물>이나 <살인의 추억>처럼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이런 불펀함 때문일 테구요. 가령 모성애를 여성의 삶을 옥죄는 굴레로 묘사했다면 비록 논쟁적일지언정 관객 입장으로선 좀 더 쉽게 수긍할 수 있을테지요. 하지만  <마더> 속 김혜자의 행동은 어떤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에 매우 불편해지는 종류의 것입니다. 일종의 신성모독이니까요. 모성은 윤리를 초월하는/할 수도 있는 신성한 본능이라는 생각이 많은 애미/애비/자식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건 웃기는 생각입니다. 본능에 '신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신성한 식욕, 신성한 꼴림, ... 웃기잖습니까?

 

모성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는, 그 강한 울림 앞에서 당사자도 제3자도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엄마이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 뭐든지 해야한다/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지요. 기껏해야 자신과 남편의 유전자에 관계된 매우 사적인 이해관계일 뿐인데도 말이에요. 마치 개인의 생물학적 본능이 사회적 합의나 윤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개인적 신념 혹은 이해관계를 절대화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떳떳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하철 등에서 고래고래 전도를 하는 개독교인들이나 노무현 영정사진을 전리품처럼 손에 들고 환하게 웃음짓는 북파공작원 패거리들같은 사람들요. 온정주의, 연고주의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데도 모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못한다는 점이 모성의 무서운 점입니다. 저처럼 누구의 애비가 아닌 사람으로선 납득하기 힘든 현상이에요. 

 

제 어머니는 제가 원빈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죄값을 치러 마땅하"기 때문에 절대 도와주지 않으실 거라고 말씀하시네요. 투표때면 민노당만 찍으시고... 우리 어머니, 멋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빈같은 얼굴에 '동네바보'라니... 열심히 노력했다는 건 알겠지만 역시 미스캐스팅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함들군요. 옛날 저희 '동네바보'는 저렇지 않았아요. 훨씬 못생겼고 더럽고 야비하고 위험했습니다.

 

너 엄마없니? 엄마없어? (2009.06.27)

  1. 알반 2013.07.23 02:58 신고


    2011.02.04


    역시, 난 선배가 이렇게 생각할줄 알고 마침 마더 TV 방송 보자마자 선배 찾았잖아요. 저 정말 어이없었던게,, 마더 보고나서 모성애는 참 위대한거 같애 요런 말을 감상이라고 하던 모모들..... 저는요 선배님 얘기처럼 신성한 모성에 늘 거부감이 지나쳐서 정상인간들에게는 그 포비아를 숨기고 살았는데 이영화 보고 완전 위로받았어요 봉준호 감독 진짜 사랑스러워요. 왜 나는 모성애=강요 라는 생각일까요. 아 저는 원빈 캐스팅 괜찮았어요. 얼굴이 좀 약간 모자라보이게 생겼어요.(아 이거 혹시 모욕에 해당하나 ㅠ) 근데 생각보다 실제론 덜 모자라는지, 영화도 잘 고르고, 똑똑한가봐요. 근데 특히 왜 김혜자여사님이 진구 신고한날 밤에 집에서 진구랑 여사님이랑 둘이 있는 장면 뒷통수 제대로지 않아요? 진짜 천재 같아요.

    • Cocteau Ozu 2013.07.23 02:59 신고

      2011.02.04

      아... 내가 그시절 무슨 얘기를 하고 다녔기에... 딱히 저에 대해 잘못 생각하신 것 같지는 않지만...

      모성애 위대...는 정말 아닌 거 같네요. 전작들과의 연속성을 생각해본다면, 여자라면 모성애! 같은 신화를 파괴하겠다는 페미니즘적인 입장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집단이기주의... 뭐 그런 것들의 원인의 하나로 모성애라는 소재를 선택한 게 아닐까 싶어요. 가만 생각해보면 <살인의 추억>에서 수사 당시 송강호는 자식이 없었는데, 그 모든 사건을 포기하고 개인사업을 하는 마지막 부분에선 자식들이 밥상에 앉아 있었고, <플란다스의 개>에선 출산을 앞둔 김성재가 뭔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비슷한 기분으로 교수직에 돈을 지불하잖아요. 봉준호는 가족이란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자기변명, 혹은 사회적 부정에 동참하는 계기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해 왔던 게 아닐까요. <괴물>에서 고아성이 자기희생을 통해 어린애를 구하고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지만, 그 가족 자체가 비전형적인 형태였기 때문에, 그 희생이 모성애의 발로라기보다 뭔가 종교적인 희생처럼 느껴지는 것 같구요.



      모성애=강요 라는 건, 모성애 자체가 아니라, 가족 구성에 대한 강요, 혹은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강요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자식을 낳았다면 제대로 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 막중한 책임의 상당부분을 국가나 지역사회가 대신할 수도 있고, 가족내부에선 남자가 더 많은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을 여성에게 떠맡기는 게 문제겠지요. 그런 시스템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그런 과도한 희생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하지 않으면, 또 그것대로 비난받거나 결혼을 종용당하게 되구요. 허허... 그러고보니 그런 종류의 압력이 굉장히 심할 나이가 되셨겠네요... 아닌가...? 혹시 결혼을 했나요? 그런 소식은 들을 바가 없는데...



      사실 모성애의 신성함에 뭐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거부감을 나타내는 건 '사회인'으로서 별로 도움되는 일은 아닐꺼 같긴 하네요. 저야 남자인데다가 남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할만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어쩌면 자식의 앞날을 위해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지금 저의 고객님들에겐 배신감을 줄지도 모르겠네요... 호호...



      진구와의 그 공포스런 대면도 재밌었지만, 전 첫 시퀀스, 김혜자가 길가에 서있는 원빈을 불안해하며 쳐다보다가 뛰쳐나가고 어쩌고 하는 장면이 더 인상에 남네요. 어릴적에 동네에 바보 없었나요? 나 어릴적엔 동네마다 한 명씩 있었는데... 저희 동네 바보를 떠올리면 원빈 캐스팅이 너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어요. 정말 더럽고 야비했고 못생겼고 위험했다니까요, 그 바보는. 그러고보니 원빈이 좀 맹~한 표정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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