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まれてはみたけれど 태어나기는 했지만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imdb

오즈 야스지로의 무성영화입니다.

무성영화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지요. 소리가 없어서기도 하지만 소리없음을 보충하기 위해 배우들은 과장되고 정형화된 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아이들은 놀랍도록 생동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명성이 자자한 채플린의 < Kid, The >의 그 꼬마아이의 연기와 비교해보세요. 오즈의 영화가 10년 정도 후에 만들어지긴 햇지만, 그 연기의 생동감은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의 아이들이 방금전까지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엄마가 밥먹으래서 콧물 쓱 닦아가며 뛰어온 것처럼 보이는 반면(물론 요즘엔 그렇게 한가한 아이들이 거의 없겠지만..), < Kid, The >의 아이는 어딘지 경직된 듯한 연기를 하지요. 왜 이 영화 속 아이들의 연기보다 < Kid, The >의 아이의 연기가 더 큰 명성을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가장 재밌게 본 무성영화에요. 가장 웃기는 코미디기도 했구요.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상영이 끝났군요.

허허... 위의 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저 이상하게 생긴 꼬마, 눈에 선하군요. 하는 짓이 어찌나 웃기고 귀여운지... ^^  (2004·06·08 12:44 )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태어나기는 했지만 生まれてはみたけれど
I Was Born, But...
1932년, 91분, 흑백, 무성, 영어자막
오즈적 스타일과 세계관이 드러나는 초기 대표작으로, 오즈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작품. ‘일본 영화계의 첫 사회적 리얼리즘 작품’이라 칭송받기도 한 이 작품은 직장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한 회사원의 고단한 삶을 두 아들의 눈으로 응시한 작품으로 풍부한 유머 속에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직장상사의 집 근처로 이사 온 요시이 겐지스케의 두 아들 료이치와 겐지는 텃세를 부리는 동네 아이들을 힘과 꾀로 물리치고 당당히 승자가 된다. 어느 날 자신들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직장 상사인 이와사키의 집에서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아버지가 직장상사인 이와사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굽신거리는 모습의 활동사진을 접하게 되는데.... 「키네마순보」가 뽑은 그해 최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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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の中の牝鷄 바람 속의 암탉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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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화는 전통적 미덕을 지닌 여성에게 호의를 보냈으며, 가령 <오차즈케의 맛>의 다에코처럼 그런 미덕을 지니지 못한 현대적인 여성은 비난어린 시선으로 묘사합니다.

물론 반동적인 여성관 때문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비난하는 것은 편협하거나 부당한 처사겠지요. 하지만 오즈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한다고 해도, 이 영화의 플롯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전장에서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궁핍한 삶을 살던 도키코는 아들이 갑작스레 장염에 걸리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단 한번 매춘을 합니다. 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이 멍청한 도키코는 그 사실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이 사실에 분개한 남편은 도키코를 집요하게 구박합니다. 심지어 우발적이긴 했지만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리기까지 해요. 도키코는 죽을 죄를 지었다며 내내 질질 짜구요, 볶아먹든 삶아먹든 니 맘대로 처분해달라며, 아내와 어머니의 도리를 지켜내지 못한 자신을 학대합니다. 남편의 개지랄도 다 받아들이구요. 화 한번을 안내요. 불가항력이었다는 변명도 않고.

가장 가관인 장면은 도키코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후 쩔뚝거리며 힘겹게 윗층으로 올라가는, 그 새디스틱한 씬입니다. 고난에 찬 여성의 일생을 미학적으로 승화한 봉건적 여성관의 감독들을 우린 숱하게 보아왔지요. 라스 폰 트리에 같은 작자들요. 오즈의 저 장면도 라스 폰 트리에 영화의 한 장면 못지않게 불쾌한데, 도키코가 겪게 되는 저 물리적 시련이 (당대의 윤리의식에 따라 규정되고 Ozu가 반복하고 있는) '죄값'에 대한 '회개'와 '응징'의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친구인 류 치슈와의 대화에서 아내를 이성적으로는 용서하겠는데 감정적(?)으로는 용서가 안된다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냥은 용서할 수 없었던 거지요. 자신의 실수로 부상을 입은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용서가 된 것입니다. 차라리 아내에게 직접적인 폭행을 가했다면 그 솔직한 반응에 공감(?)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쩔뚝거리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오는 아내를 조금도 부축하지 않고 퍼대고 앉아 있는 남편의 모습은 죄없는 범죄자를 가혹하게 심판하는 율사의 모습처럼 냉정하고 비열해보였습니다.

<피안화>에서 어머니를 연기한 다나카 기누요가 도키코 역을 맡아 답답하기 그지없는 여인상을 연기합니다.   

단 한 번도 웃을 일 없는, 어두운 영화였어요.   (2004·06·06 23:31)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鷄
A Hen in the Wind
1948년, 83분, 흑백, 영어자막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에 나간 남편 슈이치는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없다. 남편 없이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던 도키코는 아이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판다. 그러던 중 슈이치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남편에게 매춘 사실을 고백하는데..
미조구치 겐지의 <밤의 여인들>에서 창부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인기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의 호연이 돋보이는 영화. 전작인 <셋방살이의 기록>이 도시 인정물의 연장선상의 희극적인 작품이었다면, <바람속의 암탉>은 패전 후의 생활고와 가혹한 현실을 다룬 작품으로 가족간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던 오즈의 작품 세계에서 전후 일본사회에서 겪는 여성의 수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전후 일본의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묘사로 동시대의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작품이지만, 오즈의 후기 영화미학으로 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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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田家の兄妹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imdb

이 영화, 별로 재미없습니다. 오즈 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인 '풍부한 유머'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물 기업인이었던 도다씨가 죽으며 많은 부채를 남기자 자식들은 아버지의 유물을 팔아 빚을 갚고 노모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딸을 천덕꾸러기처럼 괄시(?)한다는, 눈물없인 볼 수 없는-_- 슬픈 이야기입니다.

오즈 영화의 특징적인 양식들이 구체화되던 시기의 영화인지라 오즈팬으로서는 흥미로울 수도 있겠지만, 영화 자체는 그의 이후 영화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써놓으면 이거, 무지 실례겠지요, 감독한테.^^; 다행히도 이 영화의 마지막 15분간은 코미디 그 자체입니다. 네번째 아들로 출연한 사부리 신의 젊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무척 매력적인 배우입니다. 야박한 형,누나들에게 통쾌한 비난을 퍼붓고 천역덕스럽게 남은 밥을 챙겨먹거나, 터무니없이 쑥스러워하며 바닷가 백사장 쪽으로 도망가는 그의 모습은 청승떠는 앞부분에 대해 충분한 보상이 될만큼 유쾌했습니다.

류 치슈의 젊었을 적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참 볼품없게 생겼군요. ^^  (2004·06·0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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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戶田家の兄妹
The Brothers and Sisters of the Toda Family
1941년, 105분, 흑백, 영어자막
한 가족의 몰락과 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흥행과 작품성에서 모두 성공한 초기작으로 장면간의 전환 또는 휴지부로 기능하는 여백 쇼트의 사용,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카메라 등 가장 오즈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후기 작품들의 양식과 내러티브 형태가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1937)로부터 많은 양식을 차용하며 전작들에 비해 훨씬 긴 (재)설정화면을 유지하면서 롱 쇼트로 인물을 프레임화하고 있다.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도다씨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둘째 아들 쇼지로는 중국 천진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남은 도다 부인과 막내 딸 세츠코는 귀찮은 존재로 외면당한 채 형제들 집을 전전하다 결국 처분조차 힘든 바닷가의 낡은 집으로 옮겨간다. 도다씨의 기일을 지내기 위해 천진에서 돌아온 쇼지로는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형제들의 태도에 대해 분통을 터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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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日和 가을 햇살 ★★★★

Posted 2013.07.22 11:14

秋日和 가을 햇살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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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영화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영화는 그의 영화 <늦봄>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홀아비를 두고 차마 결혼하지 못하는 딸이 홀어미를 두고 차마 결혼하지 못하는 딸의 이야기로 바뀌었지요. 재밌게도 <늦봄>에서 딸로 나왔던 하라 세츠코가 이 영화에선 홀어미를 연기합니다. (이것 역시 오즈의 영화이니 새삼스러울 것 없습니다만...)  전 하라 세츠코를 흑백영화를 통해서만 보아왔고 그 영화들 속에서 그녀는 항상 젊었거든요.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마흔이었던 그녀는 컬러영화라 그런지 노화의 흔적이 역력한,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저를 조금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놀람은 실망이나 허망함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카메라 앞에 앉아만 계셔도 저는 그만 감동해버리고 마는, 감동적인 우아함이었어요. 마흔의 여성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녀가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전 이 영화에 별 4개를 줄 수 있습니다. ^^;

<늦봄> 이후 오즈의 영화에선 카메라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조금 신경쓰며 확인해보았습니다만,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어요. 먼저 자리잡고 '앉은 채'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 앞으로 등장인물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장면들은 확실히 홍상수를 생각나게 하더군요. (홍상수는 그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브레송과 오즈 야스지로 등을 언급하더군요.)

이 영화는 무척 웃깁니다. 세 중년남들의 '지저분한' 대화는 여느 코미디못지 않게 즐거웠습니다. '맨솔레담' 어쩌구 하는 장면에선 그야말로 박장대소. 하지만, 친구의 미망인과 그녀의 과년한 영애에 대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그 지저분한 대화는 그냥 웃어넘기기엔 불쾌한 구석이 있었어요. 그런 대사를 영화속에 집어넣은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고고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오즈 영화의 인물들은 하다못해 부부끼리도 껴안지 않는 엄격한 격식과 정중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저 지저분한 대사들이 더욱 천박하게 느껴졌습니다.

akibiyori1sss.gif<늦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시집간 딸의 방에서 사과를 깎던 늙은 애비의 손을 잡아낸, 마지막 장면이었지요. 이 영화에선 비슷한 설정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금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래요. 이불 '한' 채만이 깔린 어두운 방에서 쓸쓸히 앉아있는 하라 세츠코의 뒷모습을 보여준 후 카메라는 어두침침한 아파트-하라 세츠코가 사는-의 복도를 보여줍니다. 그 쓸쓸함이란... 저의 어머니가 생각나 잠깐 코가 시큰했습니다.

오즈는 여섯 편의 컬러 영화를 찍었습니다. 전 그 색감이 참 맘에 들어요. 오래된 사진처럼 색이 약간 바랜 화면은 따뜻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세트로 세워둔 듯한 벽 위로 구름의 그림자가 흘러가는 게 보이면 그런 디테일까지 신경쓰는 감독의 섬세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패전 후 꽤 시간이 흐른 후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 영화에도 이차대전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습니다. 직접 참전했던 남자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방공호 같은 곳으로 피신해야 했던 아내와 딸의 입을 통해서 말이죠. 이렇듯 전쟁은 가해국이든 피해국이든간에 개인의 삶에 큰 위협이고 상처입니다.

하라 세츠코의 딸 역을 맡은 츠카사 요코도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운 배우였어요.

오즈 영화의 배우들은 온천 얘기만 나오면 '슈젠지'를 거론하는군요. 거기 온천이 그렇게 좋은가요?

류 치슈는 없어도 상관없을 미미한 역으로 등장합니다. 류 치슈를 등장시키려고 억지로 만든 배역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4·05·3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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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가을 햇살 秋日和
Late Autumn
1960년, 129분, 컬러, 영어자막
돈 사토미의 소설을 기초로 오즈와 노다 고고가 각색한 작품으로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그려낸 풍속 희극이자 풍부한 유머와 오즈적 에로스가 느껴지는 품격있는 작품.
<가을 햇살>에서의 가을이라는 계절은 부모들의 세대를 일컫는 말로 결혼이라는 주제와 혼자된 부모를 두고 떠나기를 망설이는 딸의 관계를 역시 중심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다. 초로의 친구들은 친한 친구의 미망인 아키코의 딸 아야코의 혼인을 돕기 위해 나선다. 하지만 그녀의 딸은 혼자 살게 될 어머니를 걱정해 결혼을 망설인다. 결국 친구들은 그녀와 어머니 모두를 결혼시키기로 계획하고, 그들 중 평소 미망인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히라야마는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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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春 이른 봄 ★★★★

Posted 2013.07.22 11:14
早春 이른 봄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http://imdb.com/title/tt0049784/

전에 본 적이 있는 영화입니다. 두 번째 본 것이지요. 티켓을 예매하기 전 간략한 시놉시스들을 다 읽었는데도 봤던 영화라는 것을 기억못한 거지요. 제 둔한 기억력 때문이라기보다 아시디시피 오즈의 영화가 워낙 그 얘기가 그 얘기인지라...

이 영화는 앞서 본 <お茶漬の味 오차즈케의 맛 >처럼 부부생활의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お茶漬の味 오차즈케의 맛 >의 부부보다 젊고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요. 잘생긴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든요. 남편과 '금붕어'로 불리는 직장동료가 술을 마시다 키스를 하는 장면은 나름대로 쇼킹했습니다. 오즈 영화에 키스 장면이라니요! 영화사의 압력(?)이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남녀가 키스를 하자 곧바로 돌아가는 선풍기를 응시해버리는-패닝이 아니라 컷으로 장면전환을 하지요-  카메라는 그런 장면에 민망해하는 오즈 자신의 시선처럼 느껴져, 뭐랄까, 귀여운 느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쇼킹한 장면은 또 나와요. 그렇게 하룻밤의 외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를 살짝 안습니다. '섹스하다'의 완곡한 표현으로서 '안았다'가 아니라 포옹을 하지요. 이것 또한 오즈 영화에선 이례적인 장면이지요. 그의 영화의 인물들은 부부일지라도 엄격한 격식 같은 것을 지키며 서로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하지 않거든요. <오차즈케의 맛>에서 부부가 먹을 것을 챙겨 부엌에서 나올 때 아내가 남편의 옷자락에 살짝 손을 대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던 거구요. 아내를 포옹하는 심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못다 채운 정욕? 아니면 미안해서? 그런 사소한 몸짓 하나로도 참 많은 감정이 표현될 수 있는 건 오즈 영화의 '절제'라는 맥락 덕분이겠지요.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데 요란한 설정과 많은 대사는 사실 낭비일 수도 있는가 봅니다.

오즈는 완벽주의적인 통제력으로 영화공간을 창조하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하다못해 소품으로 등장하는 술병의 라벨까지 일정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옥의 티 같은 장면이 몇 번 보이는군요. 가령 '728호' 사무실에서 나와 다른 사무실로 이동했는데 그 사무실도 '728호'였고, 마작인가 대작(對酌)인가 하는 테이블 밑에 놓여있던 모기향의 위치가 컷 전환후 바뀌어 있기도 했습니다. 저게 사실은 옥의 티같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연출이었을까요?

위기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샐러리맨의 애환과 그런 고단한 삶 자체에 대한 허무감을 묘사하는 데 영화는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전 장관이었던 "일본 제일의 샐러리맨"의 초라한 말로에 관한 얘기를 하며 삶의 허망함을 얘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달관이라기보다 체념으로 보이더군요. 그 쓸쓸함. 오즈의 영화가 묘하게 슬픈 건 저런 쓸쓸함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부부의 어린 아들이 몇 년 전에 죽었구요, 죽음이 임박한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의 동료도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다음날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남편은 놀라울만큼 무덤덤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죽음은 저렇게 삶의 한 구석에 자연스레 깃들어있으니 별스럽게 슬퍼할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이 영화에도 역시 이차대전의 기억이 스며있습니다. 남편이 참전전우회에 참석하여 술에 취해 군가를 부르는 장면이 있거든요. 무슨 정치적 의도가 있는 장면은 아니었겠지만, 한국 관객으로선 아무래도 좀 불편합니다, 저런 장면.

오즈의 다른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풍부한 유머로 관객을 즐겁게 합니다. 특히 "엄마, 속바지 내려갔어요."의 엉뚱한 타이밍은 정말 기가 막혔어요!

남편을 유혹하는 그 매력적인 아가씨의 별명은 '금붕어'입니다. 버리지도 먹지도 못할, 처치곤란의 아가씨라나요.

일본인들은 참 편리한 사람들이에요. 헤어질 땐 당연하다는 듯이 전혀 어색함같은 걸 느끼지 않으며 '석별의 정'을 부르고 "한 번 더 부를까요?"라고 누가 제의하면 또 다 같이 합창하고...  (2004·05·31 12:56 )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이른 봄 早春
Early Spring
1956년, 144분, 흑백, 영어자막
결혼 8년째를 맞아 부부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회사원 스기야마 쇼지는 어느 날 샐러리맨들의 하이킹 모임에 갔다가 타이피스트로 일하는 아름답고 쾌활한 가네코 지요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아내 마사코는 집을 나가는데..
‘결혼’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이른 봄>은 오즈가 주로 다루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가 아닌 결혼한 부부의 헤어짐과 재결합을 다룬 작품이다. 이제까지 오즈가 주로 다루었던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이 작품은 메이저 영화사인 쇼치쿠의 의견을 수렴해 관객 취향에 부합하는 일부 성적 문제가 가미된 멜로드라마로 탄생되었지만 여전히 오즈적 영화 스타일은 고수되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일본적인 감독으로 평가받는 오즈는 이 작품에서도 일본문화 속에 깊이 존재하는 인생의 순환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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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9)

 

お茶漬の味 오차즈케의 맛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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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오즈 영화치곤 카메라의 움직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봤자 슬금슬금 트랙킹 하는 정도지만. 남편에게 화가난 다에코가 집을 나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열차씬에서 보여주는 철교의 그 기하학적인 골격도 무척 이채롭습니다. 오즈의 영화에 삽입되는 풍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빨래나 날아오르는 풍선처럼 대체로 서정적이고 정적인데 반해, 의도적으로 오래 삽입된 저 철교 장면은 묘한 긴장감과 불길함을 느끼게 합니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도 그래요. 다에코를 연기한 코구레 미치요는 뭔가 오즈답지 않은 사건을 터뜨릴 것만 같은, 퇴폐적이고 표독스럽기까지 한 캐릭터였거든요. 요란한 꽃무늬로 장식한 그녀의 방도 불안감을 느끼게 할만큼 폐쇄적인 공간이었구요. 다다미 위에 무릎꿇고 앉아있는 대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다에코는 그런 포즈만으로도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불쾌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 불쾌감은 오즈 자신의 시선이었는지도 몰라요. 오즈는 상류계급출신의 이 현대적인 여성이 남편의 그 소박하고 성실한 품성에 감화받고 매료되는 설정을 통해, 세태 변화에 대한 그 자신의 반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사과하며 평소 안 차려보던 '밥상'을 준비하는 다에코의 눈빛은 얼마나 나긋나긋하던가요.

영화는 부부생활의 위기의 원인을 대체로 부인 다에코의 성격상 결함에서 찾는 듯 하지만, 한편으론 자식이 없다는 점 역시 그 원인인 듯 합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이른 봄>의 젊은 부부 역시 자식이 없거든요. 오즈의 영화에서 어린 자식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안정되고 평화로운 가족이 되기 위해선 자식의 존재는 필수적이라고 오즈는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두 부부가 화해한 후 야식을 챙기는 부엌씬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부엌 이곳저곳에서 밥이며 반찬 등을 찾아내며 즐거워하는 부부의 모습은 보는 저까지 흐뭇하게 만들만큼 행복해보였습니다. 된장에서 꺼낸 오이지(?)를 씻는 아내의 옷자락을 잡아주는 남편의 배려는 아, 감동이었어요.

남편은 "부부는 오차즈케의 맛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차즈케라... 그건 어떤 맛인가요? " '오차즈케'라 해서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일종)를 얹은 밥에 일본식 녹차인 '오 차'를 붓고 고추냉이(와사비)를 첨가해 말아먹는다. 와사비의 톡 쏘는 맛과 오차의 맛이 입맛을 자극한다."

과묵한 사무라이의 풍채를 지닌 사부리 신도 류 치슈만큼이나 오즈의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군요. 그 무뚝뚝한 얼굴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면 무척 즐거워집니다. 이 영화에선 류 치슈가 꾀재재하게 해가지고 파친코 사장쯤으로 나오는데  그 장난스런 표정이 무척 재밌었구요.   (2004·05·31 12:55)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오차즈케의 맛 お茶漬の味
The Flavor of Green Tea Over Rice
1952년, 116분, 흑백, 영어자막
<초여름>에 이어 오즈의 명콤비였던 노다 고고와 함께 완성한 전쟁 귀환 1호작. 완만한 템포의 유지를 위해 인물들의 이동을 보여주는 전환 쇼트의 사용, 구성의 유쾌함, 정밀하고 추상에 가까운 화면 구성에 종속시킨 카메라 움직임 등 오즈의 특징적인 영화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착실하고 검소하며 일밖에 모르는 남편 모키치 사타케를 바보 취급하는 다에코는 유한부인들과 함께 온천을 놀러 다니는 등 결혼 생활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조카 세츠코는 부부의 모습을 통해 봉건적인 중매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한 회사원 노보루와 모키치와 어울린다. 다에코는 세츠코의 반항적인 모습에서 모키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와 다툰 뒤 집을 나와 친정으로 향한다. 이때 회사로부터 우루과이로 출장가라는 명령을 받은 모키치는 다에코에게 연락을 취하지 못한 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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麥秋 초여름 ★★★★

Posted 2013.07.22 11:12

(2006.06.29)

맥추.jpg

麥秋 초여름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ozuyasujiro.com

아... 죄송합니다만 본지 며칠 지나버려서 이 영화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제 안좋은 머리도 머리지만 오즈의 영화는 비슷비슷한 소재와 한결같은 영화형식으로 유명하죠. 그날처럼 그의 영화를 하루 세 개 정도 보고나면 어떤 장면이 어느 영화의 것이었는지 막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이 영화에는 아빠(류 치슈)가 장난감 기차레일을 사다주지 않아 화가난 두 어린 아들이 집을 나가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하이요>에도  아빠(류 치슈)가 TV를 사주지 않아 화가 난 두 아들이 집을 나가버리구요. 둘 다 아빠한테 한 대씩 쥐어박히고 나서 였어요.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발견한 곳도 똑같이 역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과년한 딸아이 시집보내기'같은 소재는 4번인가 반복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영화도 그런 내용입니다.) 사건의 반복 뿐만 아니라 나오는 배우들도 거의 일정해요. <동경이야기>에서 아버지(류 치슈), 어머니,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하라 세츠코)로 나왔던 배우들이 이 영화에선 아들, 어머니, 이웃집 여자, 딸로 나오는 식입니다. 제목은 또 얼마나 대충대충 지었나요. <늦봄>, <이른 봄>, <초여름>, <가을햇살>, ...

harasetuko.jpg오즈의 영화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동경이야기>에서 노모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에 "쏘~까."를 반복하는 아들의 체념은 그 어떤 통곡과 눈물보다도 더 절절한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에도 전장에서 죽은 아들에 관한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시는 노모가 있습니다. 카메라는 눈시울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 후 뜬금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풍항계같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뜬금없이 삽입되는 풍경씬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 장면은 마치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마는, 그런 느낌입니다. 극중 인물들과 같이 울어주는 영화. 위로받는 느낌입니다.

하라 세츠코 얘기를 빼먹을 수 없지요. 하라 세츠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중 하나입니다. 오즈의 영화에 많이 출연하기도 했구요. 서구적인 마스크에 키도 상당히 커보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선 착한 며느리, 다정한 딸 등으로 출연합니다만, 이차대전 때는 파시즘 선전 영화등에도 곧잘 등장했다고 하는군요. 여튼간에 사정없이 우아한 배우입니다.  (2004·05·31 12:53)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초여름 麥秋
Early Summer
1951년, 124분, 흑백, 영어자막
혼기에 찬 노리코는 조건이 좋은 혼처를 거부하고 부모, 형제와의 상의 없이 오빠의 친구이자 아이 딸린 홀아비 켄이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갑작스런 노리코의 태도에 가족들은 당황하는데... 오즈의 대다수 영화들이 산업화와 서구화에 따른 가정의 해체에 관한 것이듯 이 작품도 딸의 결혼으로 대가족이 해체된다는 기본 골격을 따라 몇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 된 홈 드라마이다. “스토리 자체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 ‘윤회’라든가 ‘무상’이라든가 하는 것을 묘사하고 싶었다”는 오즈의 언급처럼 이 작품에서 스토리나 플롯이 중요한 기능을 하지 않음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플롯이 인위적 상황을 만들고 사실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파악한 오즈는 등장인물들의 자연스런 표현과 자연의 리듬에 집착함으로서 인물들 또한 자서전적 연기를 창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일상적인 삶에 대한 세심한 탐구, 이야기의 과감한 생략, 시공간의 독특한 사용, 계속해서 변하는 행동의 리듬을 통해 오즈 특유의 소시민적 관점이 투영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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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9)

Equinox Flower.jpg

彼岸花 피안화 ★★★★
감독 :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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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상냥하거나 할일없는 분께서 제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전 서슴없이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잉마르 베리만,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의 이름을 댈 것입니다. 그분이 조까는 소리 말고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는 감독을 대라고 다그치셔도,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오즈 야스지로는 정말로 좋아한다고 끝까지 주장할 것입니다. 잉마르 베리만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폼나라고 주워섬기는 혐의가 다분하지만, 오즈 야스지로 영화는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거든요.

뭣때문에 좋아하냐고 물으셔도 별로 할 말은 없습니다. 다다미 숏, 180도 가상선의 파괴, 완벽주의적인 세트, 절제된 카메라 웤...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를 지껄여대며 아는 '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영화사적 맥락이나 영화기술적 측면 때문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건 잘 모르기도 하구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관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맨날 수업 빼먹고 동방에 죽치고 앉아 영화나 보며 시간을 갉아먹고 있던 대학교 2,3학년 어느날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군요-, 누구랑 퍼마셨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여튼 술에 취해 알딸딸해져서 동아리방에 기어올라왔습니다. 제 정신이었다면 아마 그러지 않았을텐데, 그날은 술이 취해있었기 때문에 '영어자막'의 <동경이야기>를 플레이시킬 수 있었죠.

ozu 04.jpg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보신 분은 다들 그렇겠지만, 무척 낯선 느낌이었습니다. 앉은키 높이에 고정되어있는 카메라는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 있구요, 배우들은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며 대사를 읊어댑니다. 그런데 그 낯섬은 동시에 무척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기도 했어요. 자기모멸과 불안과 회한에 지쳐 있던 한심한 청춘을 어딘지 위로하는 듯한... 전 그날 처음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았고 오즈의 영화에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겠다고 포항서 서울까지 기어올라오기도 했구요. 제가 가장 먼저 구입한 DVD 타이틀도 오즈 야스지로의 <오하이요>였어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같은 게 재밌어봐야 얼마나 재밌겠냐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오래된 영화들이고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무척 재미있습니다. 여느 코미디못지 않게 유머러스한 장면도 많구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합니다. 민감한 관객이라면 절제된 화면에서 단아한 형식미를 찾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사건들 속에서 인생에 대한 체념과 달관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묘한 슬픔도 느끼게 합니다.

영화사적인 광채에 지레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처럼 아무 생각없는 관객도 그의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테니까요. 오즈의 영화, 놓치지 마세요. 정말 멋진 영화들입니다. 5월 28일부터 6월 10일까지 하이퍼텍 나다에서 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매진인 경우도 많으니 미리 전화예매하고 가세요.

<피안화>의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본 지 며칠 지난데다가 워낙 그 얘기가 그 얘기인지라... ^^;  (2004·05·29 03:46 )


아래는 영화제 소개글.

피안화 彼岸花
Equinox Flower
1958년, 120분, 컬러, 영어자막
오즈 감독의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결혼을 주제로 다룬 오즈의 네 번째 작품.
혼기에 찬 딸 세츠코가 동의 없이 결혼상대를 정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분노한다. 아버지 히라야마는 세츠코를 용서할 수 없으며,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엄마와 평소 친한 지인의 딸 사치코는 히라야마의 승낙을 얻어내기 위해 교묘한 작전을 꾸미는데..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의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딸과 아버지가 일으키는 일본 서민층 가족 내의 갈등과 화해의 풍속을 그린 작품. 결혼피로연 장면에서 붉은 색 벽과 검은 복장의 대비, 다다미, 책상, 책상 위에 놓인 꽃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의 하모니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이제까지 흑백화면의 간결한 영상표현에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던 오즈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이자 오즈 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유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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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감독 6인이 말하는 오즈 야스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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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단순한 사물을 지그시 응시하는 예술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나는 오즈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내 영화는 할리우드영화처럼 큰 사건도 없고, 또 드라마적이지도 않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내 영화에 대한 옹호자와 비판자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 그들 모두가 오즈를 거명했다. 지지자들은 내 영화를 옹호하기 위해 오즈를 말했고, 비판자는 오히려 그 부분을 비판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초등학생의 인생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스토리가 프레임 안에서 흘러넘치면 관객은 피곤해한다”라고. 그 점에서 오즈는 나의 변호사였다. 오즈의 영화에서도 역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와 장면만으로 오즈의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도 첫눈에 무언가 새롭다고 느꼈다. 영화가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프레임에서 프레임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오즈를 존경하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에 많은 감독들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화를 만드는 우리 각자는 상상적으로 오즈와 관계를 맺고 있다. 언젠가 빔 벤더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즈의 영화가 나에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은 사물을 예술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그걸 듣고 왜 이 감독이 오즈 영화를 동경하는지 알게 되었다. 벤더스가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과 오즈가 최고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오즈는 예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평상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단순한 사물, 그것을 지그시 응시하는 예술을…. 이것이 오즈의 제일 중요한 점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사물 그 자체’가 느껴진다. 그의 예술세계는 간단하고 평범하다. 장식없는 수수한 세계이다. 그러나 깊은 표현을 담고 있다. 이해시키려 하는 것도, 결과를 강제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위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영화 <달과 연못>을 오즈 감독과 ‘본다는 것’에 충실한 관객에게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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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뇰 드 올리베이라

산문적이어서 시적인...

먼저 오즈에게 오마주를 바치게 되어 영광스럽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오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짧은 에세이 <소박과 순수의 철학자>라는 글을 쓰고, 파리에서 오즈의 훌륭한 영화 두편을 본 정도이다. 바로 <동경이야기>와 <꽁치의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작품만을 보고도 그가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고, 또 순화된 작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즈의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가 보여주는 리얼리스틱한 면을 넘어설 수 있을 만한 리듬감은 없다. 그러나 그보다 산문적이다. 그 점이 또 다른 종류의 시적인 힘을 갖게 한다. 이건 영화 <만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오즈와 나의 공통점을 먼저 얘기하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감정의 표현법이다. 오즈의 작품에서 감정의 표현은 억제되어 있다. 나 역시 감정표현을 너무 드러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보고 관객 자신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판단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동은 결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 아니다.

그 점에서 <만춘>의 딸의 감정 역시 매우 억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감싸주고 보살펴주기를 필요로 하는 딸에게 더이상 그런 존재가 되어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딸의 행복을 비는 깊은 애정이 승화되어 있다. 육체적인 느낌보다는 아버지로서 딸의 행복을 비는 사랑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섹스는 자연의 일부이고 육체적 상상이지 감정은 아니다. 일순간의 동요로 나오는 부분도 있다. 생물적인 욕망으로서의…. 그래서 <만춘>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육체적인 관계 이상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떠나서 결혼을 하면 둘이 살아왔던 그 관계는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애정에 대한 것이지 육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요시다 감독의 말처럼 이 장면에 성적욕구가 표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딸과 아버지의 애정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생일 역시 오즈와 같은 12월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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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그만의 방법

<가배시광>을 어제 겨우 끝마쳤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만춘>과 <태어나 봤지만> <동경이야기>를 다시 보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들이고, 특히 <태어나 봤지만>은 1985년에 내가 처음 본 오즈의 영화이다. 신기한 것은 오즈의 영화는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즈의 영화는 내게 있어 한마디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글로 시작해보려 한다. 그는 어느 문학자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사물의 사실은 표면에 숨겨져 있고 표상으로서 상징되어 있다. 그래서 문자라는 것은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라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느냐,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물과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오즈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오즈 감독은 삶의 직접적인 표면을 있는 그대로 담는다. 그러나 되풀이하여 보면 그것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생활의 디테일, 즉 감추어져 있는 듯한 작은 것들이 각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에서 <만춘>의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허우샤오시엔은 영화 상영 직전 필름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이 둘의 관계를 통해 가정과 집에 대한 지배권, 쉽게 말하면 누가 이 집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담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나이가 많아져서 집에 있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내가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외출하기를 원한다. 아내는 자신의 영역인 집에 내가 오랫동안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28살짜리 딸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에게 집은 일상을 공유해나가는 그녀들만의 영역인 것이다. <만춘>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 하라 세스코가 밝은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손님과 장기인지 트럼펫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웃는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하지만 그뒤의 표정은 뭔가 못마땅해하고 있다. 자기의 집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 침범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이 컷에서 <만춘>의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확실히 느꼈다. 하라 세츠코가 연기한 딸은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성으로서의 아버지를 떠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엄마 대신에 지켜왔던 아버지를 포함하여, 즉 집(가정)을 떠나기 싫은 것인지 모른다. 이것은 일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사소한 감정의 변화는 계속된다. 일상에서 느끼는 여성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오즈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아마도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그걸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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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다 히로카즈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지만 역동적인 힘

대학에 입학했던 20살, 오즈의 영화 <태어나 봤지만>과 <낙제는 했지만>을 보았다. 분명 이때까지 본 쇼치쿠의 영화와는 다른 인상을 받았다. 뒤이어 <만춘>과 <동경이야기>를 봤는데, 한마디로 그 느낌은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즈의 영화를 보고 처음 강하게 받은 인상은 ‘대사가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이 점이 매우 의문스러웠다. 특히 류 치슈의 의미없는 듯한 대사가 반복될수록 어딘지 모르게 리듬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나의 시나리오 안에 그것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오즈를 모방하는 형태로 대사의 반복을 집어넣어본 것이다. 내가 영상이라는 매체를 접한 것은 20대 후반인데 그 이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그를 모방하면서 시나리오에 대한 공부를 해왔다. 그리고 30대가 되어 <환상의 빛>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나는 영화 속 어떤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낡은 일본 가옥 한채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넓은 집이면 오즈의 영화처럼 찍을 수 있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큰 툇마루와 10조의 다다미를 찍을 때 표준 렌즈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삐딱한 여러 각도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역시 제일 안정감 있는 각도는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오즈 영화 같은 숏이 나와버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모방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표면적으로 나의 영화는 오즈 영화를 많이 모방했지만 내가 찍은 것이 정지되어 있고 정적인 듯한 느낌이라면 오즈의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역동적인 감정이 흐른다. 이것이 차이이다. 그는 가장 동적인 순간에도 정적인 느낌을 사용하여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실패로부터 ‘이제 오즈로부터 벗어나자’라고 각오했다. 그래서 ‘나만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특히,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기의 나의 자유로웠던 감각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다. 이것이 내가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영화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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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신지

’나란히’신으로 중독시키다

나는 선배들과 달리 오즈와 아무 관계없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오즈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하고. 어제 나는 텔레비전에서 <태어나 봤지만>을 보았다. 굉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거기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옆으로 나란히 있는 형제장면이었다. 이 ‘나란히’ 기법이 새로운 한편의 영화, 아니 몇십편의 영화가 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운 현상이었다. 이런 장면을 일본영화 안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의 나란히 신을 보면서 오즈를 떠올리는 것은 오직 나뿐일까? 예를 들어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의 <죽어주세요>에서 다카쿠라 겐과 동료가 나란히 있는 신, 그리고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에서 고바야시 아키라와 다른 인물이 나란히 있는 신은 결국 오즈를 연상시킨다. 후카사쿠 긴지는 오즈와 정말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내 영화 <유레카>의 경우에도 인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 신이 있는데, 오즈의 영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히려 이 장면을 <와일드 번치>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오즈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오즈에게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오즈 중독’에 대한 내 모습이기도 하다. 오즈 중독에 대한 더 명확한 예는 최근에 만든 <달의 사막>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일부러 일본 가옥을 넣었고 카메라의 위치도 오즈처럼 하려 했다. 그리고 이야기도 가족의 일상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부 오즈식으로 하면서도 그와 비슷하지 않은, 좀더 새로운 영화가 되는 것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좌절’했다. 왠지 모르게 지루해진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즈는 좌절을 한 적이 없을까’라고 말이다. 최근에 오즈의 초기작 <즐겁게 걸어라>를 봤는데 그것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오즈도 뭔가를 모방하려 하다가 좌절한 경우라는 것이다. 즉 미국영화를 모방하려고 하다가 좌절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즈의 경우는 그 좌절로 인해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좀더 말하자면, 야마나카 사다오의 <인정지풍선>의 어떤 숏은 <즐겁게 걸어라>의 이동 숏과 정말 닮아 있다. <인정지 풍선>의 경우는 오즈의 숏을 모방하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서 새로운 느낌을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오즈의 영화가 야마나카 사다오 영화보다 훨씬 전의 영화이다). 다시 말하면 오즈가 미국영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한 경우, 그리고 야마나카 사다오가 오즈를 염두에 두었지만 극복한 경우가 나에게 큰힘을 준다. 오즈도 좌절했다는 점, 그를 모방한 또 다른 감독이 오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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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기요시

그는 우리의 무의식이다

오즈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년 전인 1980년 초 필름센터에서 하는 오즈 회고전에서였다. 그때 거의 전 작품을 보았다. 보기 전에 나는 오즈의 영화가 일본의 일상에 대해 담담하고 평화롭게 그려내는 홈드라마라고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정반대였다. 이것은 아마 오즈 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을 부수고 재평가하자는 그때의 분위기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오즈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뭔가 부자연스럽고 위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8mm영화를 찍을 때는 오즈를 응용하자는 분위기의 한편에 속해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카메라의 포지션과 시선, 즉 연출을 모방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레다 감독이 지적한 것처럼, 오즈를 흉내내고, 류치슈의 연기를 그대로 흉내내는 연기를 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오즈에 대한 모방을 그만두었다. ‘오즈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도 그만두었다. ‘오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극단적으로 싫어하게 된 것이 일본 전통 가옥 안을 찍는 것이었다. ‘가능한 한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자’라고 다짐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강령>이라는 호러영화를 찍었을 때, 어쩔 수 없이 일본 가옥 안을 찍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오즈는 피하자’라는 강박관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집안에 들어간 촬영기사는 갑자기 카메라의 높이를 낮추고 있었다. 주인공인 야쿠쇼 고지 역시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을 고정된 카메라에 맞추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말 마술 같은 일이었다. 촬영기사와 배우들 역시 오즈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일본 가옥신만큼은 오즈의 영화처럼 나와버렸다. 사실 지금은 오즈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강하게 거부하는 것 역시 이전에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오즈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로, 그가 뭘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로, 나만의 다른 연출을 생각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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