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내가 본 영화속의 터럭들.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2094/mo2094ex_901.asp

- 2002년 9월 23일 딴지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원고료는 못받았지만 ^^; 제가 누군가에게 읽힐 만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셈이죠. 무척 기분 좋습니다.
최종 수정이 반영이 안되어, 딴지 일보에 실린 기사와는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


IT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혼연일체된 관민의 가열찬 노력 덕분에, 뽀르노 동영상 구하기가 동네 편의점에서 디스 라이트 사는 것만큼이나 손쉬워진 요즘이지만, 고작 5~6년 전만해도 우리에게도 허기진 꼴림을 채우기가 터무니없이 힘들었던 보릿고개 같은 시절이 있었다. 특정 지역에서 암약하고 있는 물주를 찾아 감시와 단속의 시선을 피해가며 먼 길 발품을 팔아야했던 그 어려운 시절! 입을 것 못입고 먹을 것 못먹어가며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입수한 올칼라 사진첩을 손에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던 그 환회와 감동! 바쁜 일손에 날이 훤히 밝는 줄도 모르던 그 열락의 밤들! 뽀르노 동영상의 세례속에 굶주림을 모르고 자란 요즘 것들은 짐작도 못할 설움과 아픔들이 그 시절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렵고 힘든 시절에도 떠올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기억이 하나 있었으니, 때는 90년대 초반, 어느 정품 에로 비됴에서 잘리거나 색칠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로 등장한 여배우의 터럭을 발견한 일이었다. 그 비됴 제목은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여주인공이 자신을 윤간한 놈들 중 한 명을 유인하여 목을 매다는 장면인데, 화면 한 귀퉁이에 역삼각형 모양의 터럭이 약 1초간 보란듯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에도 국민정서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회악을 제거해야한다는 소명의식 아래 함부로 가위질을 해대는 어르신들이 계셔서, 그 영화의 다른 중요한 장면들은 옹창 드려내셨더랬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장면의 터럭 한 뭉팅이는 화면에 덜컥 나와버리는 거였다. (이 영화는 나름대로 유명세가 있어 최근에 무삭제판으로 재출시되었다. 나는 오래전에 출시된 비됴로 보았고 재출시된 무삭제판에도 그 장면이 나왔는지는 확인해보진 않았다. 하지만 날로 진일보한 가위질 기술로 미루어보아 아마 잘려나갔지 않을까 싶다.)



이 횡재스런 장면을 영접하고 난 후의 환희도 잠시, 이 장면이 어쩌면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에서 불철주야 가위질해대던 심의위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반영하는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문득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없고 욕만 들입다 쳐먹지만, 자신이 아니면 이 타락에 물들기 쉬운 연약하고 음란한 국민들의 머릿속을 누가 지켜주랴, 그런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순교자적 모습. 하지만 과중한 업무량을 초인적인 의지로 이겨내며 밀려드는 음란물에 정의의 가위질을 해대는 것도 한계에 달하고, 일순간 졸음에 빠진 사이 저 장면이 걸러지지 않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연... 그런 모습들이 오버랩되며 나의 죄의식을 자극하였고, 나는 터무니없이 음란한 자신을 자학하며 참회의 정액을 흘렸더랬다.



그러던 몇 년 후, 나는 내 눈을 의심케하는 영화속의 터럭 장면을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다시 한 번 목도하게 되었다. 새천년이 도래하더니 심의위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일까? 일반 시민들의 정신건강은 어찌하라고 저 터럭들을 잘라내지 않으셨단 말인가? 그것도 한국영화인데? 그 장면이 보다 충격이었던 이유는, 도대체 터럭이 드러나야할 이유가 전혀없는, 그러니까 본격 빠굴씬이나 꼴림유도를 목적으로 한 장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호(설경구)가 운동권 학생을 잡으러 잠복하고 있는 장소가 무슨 국밥집이나 도서관같은 곳이 아니라 하필이면 대중목욕탕이었고, 그 운동권 학생은 수줍게 가린 수건 너머로 언뜻, 그렇지만 확실하게 터럭과 거시기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역시 "일반 시민의 정서를 포괄적으로 반영한 합리적인 조치"(영상물등급위원회 김수용 위원장) 차원에서 성인들이 봐도 될 영화, 보면 안될 영화까지 구별해줘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계신 위원들인 만큼, 그분들이 터럭을 분석하는 안목은 나같은 범부의 음란한 시선과는 다르신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그 터럭이나 그 터럭이나 똑같이 시꺼멓고 꼬불꼬불한 터럭일 뿐인데 그 분들의 그 예리하고 고결하신 시선에는 뭔가 다른 차이점이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방금 목욕을 끝낸 운동권 학생의 터럭은 그 좌르르 흐르는 윤기로 인해 터럭이라기보단 모발에 가까운 운치를 띠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맥락없어 보이는 터럭 장면을 낑궈두신 위원님들의 고차원적인 윤리의식은 내 이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고, 나는 어련히 알아서 잘 하셨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님들에 대한 불경한 의혹을 거둬들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박하사탕'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난 천인공로할 두 개의 음란한 장면에 연거푸 겁탈당하고 그로키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첫 번째 영화는 스페인제 에로영화 '룰루'였다. 이 영화는 완벽한 심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었다. 한 번만 척! 봐도 해당 영화가 일반시민의 향후 성관념과 윤리의식에 미칠 악영향이 훤히 내다보이시는 분들이, 그것도 5번의 심의 끝에 상영을 허락하신 영화니만큼 그 음란함의 무해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여성의 거시기가 스크린 가득히 홀라당 까발려진 민망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거였다! 그것도 "카메라를 돌려 암시한다거나, 조도를 낮춰 식별이 불가능"(영상물등급위원회 김수용 위원장)한 상태가 아니라, 거시기의 디테일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위치, 그러니까 사타구니 근처에 카메라를 포지션하고 잡아낸 장면이었다. 그것이 신생아의 거시기였다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론 그 장면이 위원님들께서 가위질 원칙에 충실하지 못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전에 위원님들은 명랑빠굴전선에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던 극소수의 아동애자(얼라들을 보고 꼴리신다는 이상한 분들. 업자들 말로는 pedophilia)의 존재까지 염려하시어, 여자어린이의 꼬추가 등장하는 장면은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이셨더랬다. 간혹 남자아이가 잠지를 덜렁거리며 뛰어다니는 발칙한 장면이 있어왔지만, 잠지는 자랑차게, 꼬추는 음습하고 추하게 여겨온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납득할만 했다. 그런데 스토리의 진행과 별 관계도 없는 이 장면에서 그런 터부를 깨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장면에는 위원님들의 절묘한 심의질 테크닉이 등장한다. 얼라 꼬추에조차 꼴리고 마는 국민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위원님들께선 꼬추의 자태가 온전히 드러나는 장면은 삭제하셨다. 대신 간호사가 신생아의 꼬추에 땀띠방지용 파우더를 뿌리고 난 후, 얼라 꼬추의 윤곽이 흐려지는 장면을 낑궈두시어, 예술과 심의질 사이에서 아크로바틱한 발란스를 유지하시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 애기 꼬추 정도는 장난이라 할만한 기겁스런 장면을 다시 한 번 극장에서 맞이해야하는 가혹한 운명이었다. 소위 블록버스터에 그런 장면을 낑궈넣은 감독의 배짱도 놀랍거니와 어쩌자고 그런 엽기적인 장면을 잘라내지 않아 나같이 선량한 시민이 치유못할 트로마를 입도록 방치했는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문제의 영화는 뤽 베송의 "잔 다르크"다. "제5원소"에서 밀라 요보비치의 그 삼삼한 몸매를 떠올리며 극장을 찾았다가 허벅지라도 좀 보여줄 일이지... 안타까와하느라 잘 기억이 안나실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는 내노라하는 고어영화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잔혹한 장면이 나온다. 잔 다르크가 아직 소녀일 적에 영국군이 그녀의 집을 습격한다. 그녀를 옷장같은 곳에 숨겨놓은 그녀의 언니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강간을 당한다. 순서에 주의하시라. 강간당한 다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배에 칼이 꽂혀 벽에 매달린 채 죽어가면서 강간을 당하는 것이다! 위헌판정도 불사하는 막가파 정신으로 무장하시고 지들 꼴리는대로 아무 영화에나 가위질 해대시는 등급위원들이 8명이나 포진해 계신 태평성대의 시대에 어떻게 저런 장면이 삭제되지도 않고 극장에 버젓이 걸리는 이런 쿼바디스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 위원님들이여, 유혹에 빠지기 쉬운 저희 어린 양들을 내팽개치시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영화 이후 나는 한동안 혼란속에 살아야만 했다. 도대체 이 터럭은 되는데 저 터럭은 안되고, 이 강간은 되는데 저 화간은 안되는 이 기묘한 취사선택의 메카니즘은 무어란 말인가? 오랜 고민 끝에 이 모든 모순들은 결국 한가지 음모론(?)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 등급위원들, 인간인 척하고 있지만 실은 사이보그같은 게 아닐까? 아직까지 성과학과 신경생리학, 컴퓨터공학의 기술 수준이 미미하여 제대로 작동하지도 못하는 빠가사리 수준의 사이보그 말이다. 일반적인 인간이 성적 흥분상태에 빠지게 되는 성적 신호같은 것은 스크린에서 찾아낼 능력은 없고, 고작 할 줄 안다는 것이 성기노출 여부의 판별 정도여서, 터럭 한 올이나 자쥐의 한 구석, 혹은 음순의 한 자락만 보여도 지랄발광을 해대며 아무렇게나 가위질을 해대는 멍청한 사이보그 말이다. 이 물건은 그나마 오작동이 심해 '네 무덤..'이나 '박하사탕'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가끔은 터럭을 모발이랑 구별하지도 못하고, 터럭없는 거시기도 있을 수 있다는 사회학적 연구결과조차 반영이 안되서 자랑차게 드러낸 여자 애기 꼬추에도 O.K. 싸인을 보내곤 한다. 게다가 이 빠가사리들은 정신 박약 수준의 판단능력 이외에도 치명적인 결점마저 갖고 있다. 성기노출여부에만 골몰하다보니 신경회로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도통 폭력장면에는 무감각한 것이다. 배에 칼을 꽂아놓고 시체를 강간해도 성기묘사만 없으면 18세 이상의 입장이 괜찮고, 임산부의 배에 발길질을 하고 도끼로 머리를 찍어도 피만 안튀고 빠굴장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만 없으면 15세 입장도 가능하며('조폭마누라'),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잘려진 머리 8개가 굴러다니는 영화도 피만 안튀기면 15세 청소년이 봐도 상관없다('가방속의 8머리')는 식이다. 누가 저런 물건들에게 우리의 볼 권리, 보고 꼴릴 권리을 재단하고 금지할 수 있게 만들었단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깅가밍가하지만, 최근 노친네들의 빠굴씬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을 받은 '죽어도 좋아'와 관련된 논란 덕분에, 저 해괴하고 멍청한 물건들의 정체와 목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저들이 지키려하는 건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일반 시민들의 건전한 성윤리 같은 게 아니다. 법적 근거도 없는 폭력을 휘두르며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기본권-창작의 자유와 꼴릴 자유-를 유린하게 만드는 등급위라는 그들의 알량한 위상과, 그들의 헛지랄에 똥꼬 긁어주며 잘하는 짓이라고 애무해대는 일부 도덕주의자들을 보호하려는 수작이었던 거다. 터럭인지 아닌지, 거시긴지 아닌지도 구별할 줄 모르는 것들이!



꼴림을 방해받은 그동안의 인생이 통한스러운대로, '죽어도 좋아'의 일반 극장 상영을 촉구하는 바이다. 이건 '죽어도 좋아'가 일반 극장 상영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좋은'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가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고 죽음 바로 앞에서 찾아온 삶의 환희를 감동적으로 묘사해서만은 아니란 말이다. 이 영화의 교훈적 측면이나 영화사적 가치가 이 영화가 일반 상영되어야 할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저 빠가사리 등급위원들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일 수도 있다. 쾌락의 열정에 빠져 열심히 빠굴만 뛰는 영화나 채우지 못한 애욕에 꽈배기처럼 온몸 뒤트는 영화는 상영이나 제작을 금지해도 된다는 말인가? 애시당초 오로지 꼴림만을 목적으로 한 영화라는 식의 판단을 내린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준뽀르노 주제에 깐느라는 제도권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각의 제국'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 성인 남녀에겐 좋은 영화를 보고 감동받을 권리뿐만 아니라 꼴릴만한 영화를 보고 꼴릴 권리도 있는 것이다. 할배,할매의 빠굴씬에서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의 환희를 느낄 권리도 있지만, 오늘 밤 그/그녀랑 거시기할 때 써먹을 테크닉을 전수받을 권리도 있다는 얘기다. 한가지 기술을 2,30년만 연마해도 '장인'소리를 듣는데, 빠굴경력 50여년 두 노인들의 치고빠지는 기술과 당기고받아치는 기술은 얼마나 현란할 것인가?



그래서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외친다. "우리에게 맘대로 꼴릴 권리를 달라!"고. 안그래도 되는 일 없어 짜증나는 세상에 내 맘대로 꼴릴 자유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냔 말이다.





p.s. 개인적으로 꼽는 가장 야시시한 터럭 씬은 이태리 에로 영화의 큰형님 틴토 브라스의 '모넬라'에 나온다. 온몸으로 유혹해도 거시기를 안해주는 약혼남이 야속한 모넬라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자기 터럭으로 혼자 농탕질을 친다. 아.. 그 야들야들한 터럭의 질감이란... 물론 국내 출시판 비됴로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없다. 나쁜 쉐이들...



p.s. 난 터럭 페티시스트이긴 하지만 내가 영화로 본 가장 이롸릭한 장면은 터럭과 관련없다. 제목과 달리 노출정도는 실망스러웠던 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에서 두 중년의 남녀가 한창 거시기 중이신 장면이다. 기껏해야 가슴 정도만 보이는 장면이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잡담들과 섬세한 몸짓은 그 어느 노골적인 정사씬보다도 사실적이었다. 저 빠가사리들은 알턱이 없겠지만, 이런게 바로 에로티즘이다.

 

집으로... ★★★
이정향  2002  
naver

[ 포항공대신문 2002년 5월 8일자 신문에 실린 영화평입니다. ^^; 신문에 실린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가장 좋은 기쁨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으려는/ 따신 봄볕 한 오라기,/ 자기 몸에는 걸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 옛적 마음을/ 저도 이미/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저도 또한 속 깊이/ 그 어머니를 갖추고 있나니." (이성부, "어머니가 된 여자는 알고 있나니" 중)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다. "집으로.."를 보러 극장을 찾은 중장년의 관객은 이 영화의 외할머니(김을분 분)로부터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젊은 관객도 마치 '어머니'의 원형을 어딘가에 모셔두고 먼길을 떠나 온 듯한 그리움을 느낄지 모르겠다. 외할머니뿐만 아니다. 특별하진 않지만 어딘지 눈에 익은 영화 속 풍광과 시간을 거스른 듯한 시골마을사람들의 순박함은, 있지도 않은 고향마을에 대한 향수와 함께 잃어버린 소중한 어떤 것에 대한 애틋함을 자아낸다. 이 모든 것들의 한 이름인 '외할머니 혹은 어머니'는, 그래서 생래적인 그리움의 이름이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여자다. 어머니와 감독 자신이 여자인 것처럼. 남성인 이성부는 '어머니가 된 여자는 어머니(의 마음)를 갖추고 있다'는 기묘한 동어반복으로 어머니가 된 아내의 변화에 그저 감동만 받으면 될 뿐이다. 하지만 동북아의 이 작은 나라에서 어머니의 삶을 살았거나 혹은 그 삶을 지켜본 여성(감독 자신을 포함해서)이라면, '어머니'라는 이름이 갖는 깊은 울림에 대해 회한의 감정뿐만 아니라 어떤 '분노'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영화에서는 예사로이 생략되었지만, 평탄하지 않았음에 분명하고 무엇보다 한 집안과 자식을 위해 '김을분'이라는 자신의 존재감을 "걸레처럼 뭉크러"버렸을(최영미) 한 여성으로서의 일생을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는 '여성'감독이 '어머니'에 관해 말하는 영화로서는 지나치게 편협하고 안이하게만 보인다. 더욱이 그 작은 나라에서 손에 꼽을 만큼 희귀한 '여성'상업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의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영화임에랴! 이건 마치 농촌현실의 비참함은 외면한 채 그 여유로움과 인간적인 일상만을 묘사하는 "전원일기"의 치사함이나, 우정의 덫에 갇혀 연고주의에 대한 반윤리적 찬가를 불러대는 "친구"의 무책임을 보는 듯 불쾌감을 준다.

물론 한 여성의 개인사와 관련된 애틋한 기억까지 페미니즘의 전장에 볼모로 나서야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그러기에 적절한 계제가 아니다. 가정의 달이 가까워오는 시점에서 "집으로.."가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제스쳐는 분명해 보인다. 모든 연령층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할 것. 외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연상시키는 무한정하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 번잡하고 고달픈 일상의 도시인들이 언제든 다시 돌아가 위안받을 수 있는 자연과 같은 관대함을 보여줄 것. 결국 '외할머니 혹은 어머니'라는 이름의 낙원을 만들 것. 이 목표를 위해 감독은 천명된 제작의도('외할머니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의 순수성과 어울리지 않는 계산된 작위성과 진부함을 늘어놓는다. 요컨대 이 영화의 컨셉만으로도 이 영화에 나올만한 에피소드들과 결말이 그려지고 실제로 그런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김을분'은 도대체 누구의 외할머니란 말인가? 우리들 중 누구의 외할머니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예외적으로' 외진 산골마을에 살고 계시며 헤진 고무신을 기워신을 만큼 '예외적으로' 빈궁한 삶을 살아 자손들을 애처럽게 만드시는가? "집으로.."의 외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인 동시에 누구의 외할머니도 아니다. '외할머니 혹은 어머니'라는 기표 아래 관객들의 퇴행과 자기연민의 욕망이 꿈틀대는 '환상'일 뿐이다.

하지만 살인광과 깡패, 흡혈귀와 전쟁광이 휘젓고 다니는 예의 그 영화판에서 "집으로.."같이 소박하고 차분한 영화가 주는 감동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런 맥락에서 관객들이 보기 원하는 순한 영화를 입맛에 맞게 만들어내는 감독의 감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테다. 단, 감독 임순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독 이정향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녀가 여성임을 지나치게 의식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또 감독의 두 편의 영화가 보이는 순수한 감성에 지나친 호의를 갖는 것도 위험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 올해의 가장 좋은 여성영화로 뽑힌 98년, 임상수의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최악의 여성영화 중 한 편으로 뽑혔다. 사랑에 목맨 공상녀의 사랑찾기라는 '동화'가, 동시대 여성의 섹스관을 노골적으로 다룬 '르뽀'보다 더 좋은 영화라고 뽑는 그 나이브(naive)함을 조심하자는 말이다. 가족 나들이로 "집으로.."를 본 어느 꼬마가, 일생의 고단 때문에 다소 거친 심성을 갖게 된 자신의 외할머니가 '집으로..'의 외할머니처럼 다감하지 못함에 불만을 갖거나, 엄마에게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외에 엄마 자신의 인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2002/5/2)

Billy Elliot 빌리 엘리엇 ★★★
Stephen Daldry  2000  
imdb

[ 2001년 3월 7일자 학교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이 영화는 흡사 촌부(村婦)의 궁상스런 자식자랑을 연상시킨다. 논팔고 소팔아 먹을 것 못먹고 입을 것 못입으며 고생고생 공부시켰더니 요번에 서울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쩌구 하는... 물론 이 영화는 젊은 관객의 짜증을 유발할만한 청승맞음 대신 세련되고 때로는 단호한 화술로 진행되는 현명함을 보인다. 예컨대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흘러나오던 The Clash의 경쾌한 펑크 'London Calling'은 시대의 암울을 볼모로 우리의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발랄함은 그것이 소년 빌리의 시선에 맞추워 관찰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 덕분에 그 장면은 탈현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11세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밖에서 벌여야 하는 몸싸움과 곤봉세례의 의미와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혹은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카메라가 형과 아버지의 세계, 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면 영화는 여지없이 신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다.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으로 향하는 아버지가 형과 뒤엉켜 통곡을 하는 씬은 언제 손수건을 꺼내야 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강요라는 신파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현실과 탈현실의 경계에서 균형을 잡는 솜씨는 참으로 절묘해서, 무산계급 출신의 입지전적 출세기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들이 처한 절망적 시대상을 외면하지 않고, 동시에 한 어린 예술가의 춤에 대한 열정까지 한 화면에 잡아내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인다. 감독의 두 손엔 흥행과 비평적 찬사라는 두 마리의 토끼가 쥐어졌고 "규모의 경제학"이 영화제작의 정설로 자리잡은지 오래인 요즘, 보기드문 미덕을 갖춘 영화라는 평가엔 나도 동의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영화는 사기에 가깝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 갈수록 "켄 로치가 만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에서 후자에 힘이 실린다. 켄 로치의 <레이닝 스톤>에서 실직중인 아버지가 고생 끝에 얻은 것은 단지 한 벌의 성찬식 드레스 뿐이지만, 이 영화에서 탄광 노동자인 아버지는 내용이 생략된 수고로움의 댓가로 아들을 발레라는 부르주아 예술의 정점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천만다행 우리의 빌리는 성공을 할 수 있었지만, 상상해보자. 발레의 주연으로서 화면 가득 아름답고도 힘찬 몸짓을 펼쳐보임으로써 빌리가 발레리나로서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지막 장면 대신 로열발레학교의 막대한 교육비를 감당못해 자퇴를 하게 된 빌리의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을 차지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암담하고 불쾌했을까? 물론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희생은 감동적이지만 한 가족의 희생으로 자식이 성공한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만약 이 영화의 상황에서 아버지가 희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런 아버지가 야박하다고 생각된다면 야박한 건 아버지인가, 아니면 부정(父情)을 가로막는 척박한 현실인가? 사랑하는 아내의 유품을 뗄감으로 써야할 만큼 가혹한 가난과 끝날줄 모르던 파업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성공의 열매를 함부로 수확하게 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상업적 타협이다. 결국 이런 영화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주는 감동과 눈물의 향연은 저항하기 힘들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니 자, 의자 깊숙히 엉덩이를 밀어놓고 손수건을 꺼내자. 무덤덤한 가장(家長)들 조차 울리고야 만다는 소문의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자리의 아가씨들은 연신 눈밑을 닦아내며 연민의 감탄사를 뱉어낸다. 나는 궁금해진다. 20여년 전 남의 나라 노동자들의 별스러울 것도 없는 가난에 눈물 흘리는 저 사람들은, 바로 오늘도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리 해고자들의 피끓는 분노와 절망에도 눈물 흘릴까? 노동시장 개혁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리 없는 소재가 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때에만 슬픈 것일까? 문제는 슬퍼할래야 슬퍼할 만한 영화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빌리의 가족보다 덜 비참할 것도 없는 수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내몰리고 서울역에 노숙자가 넘쳐나던 98, 99년과 또 다시 결식아동이 늘어나고 있는 2001년, 우리는 어떤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던가/있는가? <여고괴담>이나 <주유소습격사건> 같이 전혀 현실감각이 없는 영화들, 혹은 <박하사탕>이나 <춘향뎐> 같이 과거속에서만 헤매는 영화들, 혹은 <비천무>나 <리베라메>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켄 로치나 마이크 리 정도의 영화는 고사하고, <빌리 엘리엇>같이 공감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가진 상업영화라도 볼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겐 결국 희박한 성공의 가능성 속에서 빌리 엘리엇처럼 운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꿈꾸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그저 머리를 비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 같다. (20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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