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rk Knight 다크 나이트 ★★★★☆
Director : Christopher No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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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에 쏟아지는 극찬들에 진작부터 몸이 달아있던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개봉 첫날 보러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크 나이트>는... 걸작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대부2>나 <스타워즈 5>와 경쟁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고 하는데, 저 두 영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저는 물론이고, <다크 나이트>를 직접 보신 분들이라면 대체로 비슷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 짐작합니다. <다크 나이트>가 저 두 영화, 아니 블록버스터라는 꼬리표를 달고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그 어떤 영화보다도 높은 완성도를 가진 영화라고요. 한마디로 엄청난 영화입니다.

제가 배트맨 시리즈, 심지어 팀 버튼의 <배트맨>조차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고 싶군요. 미국 수퍼히어로들이 나온 그 많은 영화들 중 그 어떤 것도 제게 '신기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가령 전 <엑스맨 2>가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은유를 품고 있다는 점은 기특해 하면서도 그런 은유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빈곤한 의미의 층위에 한심해 했습니다. 팀 버튼이 선악구분이 모호한 자아분열적인 배트맨을 스크린에 창조했다고 평단의 찬사를 받았지만, 제겐 포스트모던 어쩌구하는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예술가의 감각만이 흥미로웠을 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도 그 화려한 볼거리를 감탄하며 즐기긴 했지만 제겐 그냥 얄팍한 영화일 뿐이었어요. 악을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배트맨의 사연은 충분히 납득할만 했지만, 실제로 배트맨으로 활약하게 된 이후에 브루스 웨인의 고민들은 피상적으로만 그려질 뿐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만화 원작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중국 대륙 깊숙한 곳에 닌자양성소 같은 게 있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었고 라스 알 굴 패거리의 논리도 전혀 전혀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가장 신경에 거슬렸던 건, 배트맨의 다양한 첨단장비들을 설명하기 위해 끼워놓은 설정이라는 혐의가 다분하긴 하지만, 지극히 선한 존재로 묘사된 아버지 웨인이 폭스를 수장으로하는 무기제조 부서를 운영했다는 점입니다. 고담시 안에서는 선량하고 존경받는 부자인척 하지만 사실 배트맨의 아버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종류의 인간인 '무기제조업자'이기도 했다는 거지요.

제가 <다크 나이트>를 가슴이 벌렁댈만큼 신나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것도 이와 관련있습니다. '선' 그 자체인 하비 덴트가 "The night is darkest just before the dawn. And I promise you, the dawn is coming." 라며 테러(악)와의 전쟁에서 다소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다는 뉘앙스의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에선 어쩔 수 없이 부시가 떠올라 무척 불편한 느낌이었습니다. 고담시에 거주하는 전 시민의 핸드폰 통화를 감청하는 배트맨의 장비는 미국 애국법(USA Patriot Act)의 이상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처럼 보였구요. 물론 <다크 나이트>가 이 어수선한 테러리즘의 시대에 어느 한쪽의 입장을 두둔하는 편파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해석함에 있어 미국 영화라는 태생적 한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도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 나이트>가 고민하는 선과 악의 문제, 만연한 폭력과 그에 대한 자구행위의 정당성 같은 문제는, 블록버스터로선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만큼 진지하게 다뤄집니다. 영화속 인물들이 이러저러한 딜레마에 처해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들에 직면하여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심장을 휘벼파는 듯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가장 순수해서 가장 고통받게되는 하비 덴트의 운명은 보고있는 제 가슴이 다 먹먹해질만큼 가혹한 것이어서 소포클레스나 라스 폰 트리에가 연상되더군요. 놀라운 점은 이 절절한 사연들과 심각한 사유들이 트레일러가 공중제비를 하고 병원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는 돈지랄 스펙터클과 함께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거야 말로 <다크 나이트>가 개척해놓은 새로운 영토이고 아마도 꽤 오랫동안 <다크 나이트> 이외에는 도달할 수 없을 듯 하군요. 심지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음편 배트맨조차 <다크 나이트>의 성과를 넘어설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다크 나이트>는 블록버스터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점에 위치한 영화이니까요.  

<다크 나이트>에서 가장 스릴넘치는 부분은 바로 두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의 생사를 결정해야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마저 없었다면 <다크 나이트>의 세계가 너무 암울하고 절망적이어서 블록버스터가 감당할 수 있는 비관의 한계를 넘어서겠지만, 전 그들의 도덕적인 선택을 현실감있게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조커라는 존재가 정녕 무서운 이유는, 그리고 하비 덴트의 급작스런 변화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악한 본성이 있고 적당한 상황에선 쉽게 드러나기도 한다는 점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살인/강도를 일삼는 죄수들도 사실은 선한 본성을 갖고 있다고 묘사하는 그 장면은, 일단 뭔가 안심이 되고 꽤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크 나이트>의 세계관과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구요. 무엇보다 결국 조커의 극단적인 사악함은 조커의 광기에 기인한 것일뿐,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해석되어 버리잖아요. 전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공정택이 교육감이 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당신은?

흔한 오해와 달리, 배트맨 자신을 포함하여 고담시에서 누가 악당이고 누가 좋은놈인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요? 선량한 척하는 나쁜놈들을 법률적 판단이라는 미명하에 좋은놈으로 포장해주고, 좀 소란스럽지만 착한 사람들은 '정의사회구현' 들먹이며 나쁜놈으로 몰아가는 대한민국의 도덕적 상황은 고담시와는 다른 차원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조커는 투 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에게 대충 다음처럼 말하지요. "사람들은 내가 갱단이나 군인을 죽인다면 가만 있지만, 시장을 죽인다고 하면 공포에 떨며 혼란에 빠지지." 만약 조커가 바쁜 와중에 한국까지 왕림하신다면 어느놈부터 죽이려 들까요? 조커가 정치가, 가령 대통령쯤을 죽여주신다면 국민들이 공포에 떨며 혼란에 빠지게 될까요? 요즘같은 때라면 오히려 영웅취급 받게 되어, 조커가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심각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까요?

히스 레저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군요. 그는 어떤 영화제에서 어떤 상을 받는다 하더라도 누구나 납득할만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가 연기한 조커는 정말 무섭습니다. 그가 조커 연기에 너무 몰입한 것이 자살의 한 원인이었을거라는 루머가 그럴듯해 보일 정도에요. 그 이상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놀라운 연기를 보였다는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한 배우의 유작으로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뛰어난 배우의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은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레이철 역의 매기 질렌홀은 아무리봐도 미스캐스팅입니다. 전편과 동일한 인물인데도 배우가 바뀐 것부터가 치명적인데다가, 매기 질렌홀은 좋은 배우이긴 해도 사실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는 아니잖아요? 아시아를 뒤흔든 섹스머신 진관희도 나오는데, 그 명성에 비하면 정말 안스러울 정도로 미미한 배역을 연기합니다. 한 0.7초 정도 나올까요. 잘 찾아보시길...

<다크 나이트>, 미국에선 기록을 갈아치우며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에선 힘들 것 같군요. 아마도 <놈놈놈>보다 적은 관객수를 기록하겠지요. 가령 앞서 말한 배 씨퀀스와 조커가 경찰청장 등을 살해하는 씨퀀스에서 보여준 평행편집의 긴장감, 잘 짜여진 추격씬, 빈틈없는 시나리오와 완벽한 캐릭터라이징 등과 비교해보면 <놈놈놈>의 만듦새가 얼마나 엉성한지 잘 알 수 있을텐데 말이에요. 블록버스터의 계절에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보기엔 <다크 나이트>는 너무 무겁고 심각합니다. 보고나면 맥주라도 한 병 마시지 않으면 잠들기 힘듭니다. 영화 자체가 길기도 해서 보고나면 진이 다 빠져요.

경찰 중 한명이 결정적인 배신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랍니다. 명박이의 민영화가 착실히 성공한다면 저꼴 나겠죠, 우리나라도?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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