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th MARCH 2008

<첫사랑, 마지막 의식>과 함께 주문한 이 책을 택배로 받아 보았을 때, 전 질려버렸어요.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라니... 이렇게 두꺼운 소설은 2005년도에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제 나름의 기준에 따라 문학사의 고전으로 평가받은 책이 아니라면 많은 시간을 들여 한꺼번에 읽어내야 할 장편소설은 거의 읽지 않거든요. 작가 소개말이나 인터넷 책소개에 따르면 이언 매큐언은 영미문학권에서 꽤 영향력있는 작가인 듯한데, 저로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먼저 읽고 나선 <속죄>까지 산 것에 대해 후회하기도 했어요. 최근 영화가 개봉하기도 해서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사면서 덩달아 산 건데,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썩 자극적이고 재밌기는 했지만, 근친상간과 강간, 신체절단이 묘사된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낼만큼 제가 기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건 모두 오해였어요. <속죄>는 예전 고등학교 때 읽었던 <제인에어>나 <부활>처럼 가혹한 운명과 비극적인 사랑이 장중하게 펼쳐지는, 고전의 향취가 느껴지는 소설이었거든요.

대충 어떻게 소설이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브로이니의 경솔함 때문에 로비가 모함에 빠지는 장면에선 명치끝이 저려오는 듯한 분노가 치밀기도 했었습니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비극적인 사랑에 가슴 아파하기도 했구요. 두 연인의 운명에 2차대전이라는 문명의 몰락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두 연인의 비극이 인류의 비극으로 덮여지지 않았다면, 전 브로이니와 무자비한 운명에 분노하며 읽던 책을 집어던졌을 거에요. 고등학교 때 <테스>를 읽으며 그러했던 것처럼. 예, 저도 압니다. 이런 감상이 저같은 아저씨가 할 소리가 아니라는걸.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흥분해보기는 또 중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 읽고 있자니, 나의 인생의 목적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닐까, 같은 잊고 있던 망상이 다시 떠오릅니다.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타인에게 어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브로이니는 10대 초반의 불안한 정서를 가진 소녀이지만, 그런 오만에 찬 자의식은 연령을 초월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결함이잖아요.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런 무감각한 폭력이 초래한 비극을 소설 속 2차대전에서,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숱한 야만들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근거없는 루머를 입에 담으며 함부로 타인을 평가하는 건 저의 못된 습관 중 하나입니다. 딱히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는 자의식도 없이 이루어지는 그런 무책임한 평가를 실제로 입에 담지 않더라도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벗어난 천박한 행동이고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부끄러워지는군요.

전 아기를 매우 좋아히지만 어린이에 대해선 어떤 적의를 갖고 있었나 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어요. 10대 전후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의 그 불편함이 사실은 그들의 무분별함과 비이성과 불안한 정서와 성마름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던 겁니다. 아이들은 무서워요. 사악하구요.

소설을 읽고 최근에 개봉했다는 <어톤먼트>(이런 병신같은 작명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덜 떨어진 스노비즘이랍니까?)를 대충 훑어봤습니다. 전 두루 인정받는 고전이 아니라면 원작보다 영화를 보는 편이 시간절약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역시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톤먼트>는 <속죄>에 대한 사려깊은 해석이라고 찬사받는 영화인 것 같고, 해안가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나 물에 떠있는 세실리아처럼 인상적인 장면들도 많은 영화이지만, 역시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많은 실패작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벼운 대사와 단순무식한 단순화로 원작의 행간을 상상하고 싶어하는 독자의 상상력을 짓밟아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간적 축약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존재감이 별로 없는 로비 역의 제임스 맥어보이와는 달리 세실리아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는 변함없이 아름답구요. 인터뷰로 마무리짓는 결말부도 지나치게 설명조이긴 하지만, 그밖에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달리 생각나는 바도 없네요.

여튼간에 간만에 읽은 근사한 소설이었습니다. 요즘엔 웬만한 책은 읽고 팔아버리는데 이 책은 도저히 그럴 수 없네요. 일찌감치 팔아버렸던 <첫사랑, 마지막 의식>도 아까워졌습니다. 시간나면 그의 다른 소설들도 다 읽어볼 계획이에요.

그 두께만큼이나 가벼운, 예를 들어 옴니버스 구성의 일본 대중소설들에 빠져 계신 분들이나, 삶에 치여 소설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문학소년/소녀였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술 마시고 옷 사입으실 돈과 시간으로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봅니다. 잊고 있던 문학적 감동이 느껴지실 거에요,.



 

 

 


Atonement 어톤먼트
Director:Joe Wright
naver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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