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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반지의 제왕 ★★★
Peter Jackson  2001  
imdb

판타지 소설은 읽어 본 적도 없고 읽을 생각도 없다. 톨킨이나마나 엘프니 마법사니 하는 것들이 나오는 소설을 정색을 하고 읽어낼 재간이 나한텐 없어서다. 하지만 개인적 취향에 관계없이 이렇게 흠잡을 데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1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감각소여 차원에서 실감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라. 1500억원이 알차고 요령있게 쓰여진다면 이런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팬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반지원정대'가 혹시나 '배트맨'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 그렇지 못했다. 피터 잭슨은 소위 천재 감독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지만 막대한 예산의 블록버스터 안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수완있거나 제작자가 뭐라고 지껄이든지 간에 자신만의 영화세계에 몰두할 만큼 자폐적인 감독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그새 돈맛에 길들여 졌던지.

앞으로는 '반지의 제왕'의 감독으로 알려지겠지만, 사실 피터 잭슨은 몇 년 전만해도 'Brain Dead'나 'Heavenly Creatures'의 감독으로 알려졌었다. 둘 중 어느 영화의 감독으로 생각하느냐는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두 영화 모두 발칙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잔인한 유머로 장식된 뛰어난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브레인 데드'는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막 복학하고 몇 년만에 찾아가 본 동방 캐비넷에 꽂혀있던 이 영화의 no-cut판! 날라다니는 머리들과 춤추는 내장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그 경이로운 도살씬! 억눌리고 주눅든 군생활의 기억과 뭐가뭔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복학생활의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영화가 있을까? '브레인데드'는 스플래터 무비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었고 나는 이 영화에 열광했었다.

그 밖의 다른 영화들도 그의 별난 취향과 특이한 유머감각이 엿보이는 수작들이었다. '프라이트너'는 피터 잭슨의 영화치곤 너무 싱거운 게 로버트 저맥키스가 제작한 영화라는 것이 어쩔수없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토브 후퍼가 스필버그와 손잡고 찍은 '폴터가이스터' 정도로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화史에 관한 뻔뻔한 의사다큐멘터리 'Forgotten Silver'는 (당연히) 평론가의 찬사를 얻어냈으며 영화 자체도 재밌었다. 하지만 이렇게 몇편의 영화가 연달아 성공했다고 해서 뉴질랜드 출신의 이 괴상한 감독에게 1억달러짜리 영화가 덜컥 맡겨진 것은 정말 영문모를 일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제작사의 탁견으로 판명되었지만 처음엔 어이없는 결정처럼 보였다. 이건 마치 '비틀쥬스'의 감독에게 '배트맨'을 맡기는 꼴 아닌가? 동시에 상황이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 영화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하나 '반지의 제왕'이 '브레인 데드'의 에픽 버전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거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영화적 사건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피터 잭슨은 왕년의 그의 광팬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지의 제왕'을 정.석.대로 연출했다.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지만 그 결과 피터 잭슨의 흔적은 하나도 안남은 영화로.


물론 이런 뛰어난 영화를 앞에 놔두고도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지껄인다면 그건 단지 시대착오적인 객기일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예산이 커질수록 그 영화가 소위 '작가영화'에서 멀어질거라는 점은 상식수준에서도 예측가능한 결과이다. '더 많은 제작비'는 감독의 상상력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 뿐만아니라 그런 재현의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기술자와 제작비 회수에 노심초사하는 제작자의 간섭이 더 커질 가능성을 동시에 의미할테니 말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면 천하의 피터 잭슨이라도 맹글러에 좀비의 몸통을 끼워놓고 내장을 뽑아내는 장면같은 것을 그의 영화에 낑궈놓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이전 영화는 피터 잭슨의 영화임에 분명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론 누구나 "반지의 제왕"을 피터 잭슨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겠지만 피터 잭슨은 정말 "반지의 제왕"스런 감독인가? 블록버스터는 그 나름의 목표가 있고 투자이익을 챙겨주기 위해 어디까지나 안전하고 검증된 방법으로 영화를 제작해야 하고, 그러라고 비싼돈 주고 감독을 모셔온 걸테니까 굳이 실망이니 뭐니 들먹일 필요도 없지만, 그 감독이 다름아닌 피터 잭슨이고 보니 이런 바램이 든다. 저런 공룡같은 영화도 한 번 찍어봤으니까 이제 그만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에 찍던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주시길, 저런 영화는 카메룬이나 마이클 만 같은 거한테나 찍으라고 하고... 물론 나같아도 이런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저버리고 뉴질랜드같은 촌구석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이 들리 없겠지만, 여튼 바램을 그렇다. 70여편의 영화제의를 마다하며 "아직은 할리우드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 뜻대로 모든 걸 컨트롤하는 게 중요한데 그곳에서는 그게 힘들 것 같다."라고 말하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고지식함 혹은 작가적 고집이 아쉽다. (200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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