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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
김기덕  2001  
naver

[ 딴지일보 온라인 검열우원에 지원하기 위한 revised version입니다.]

"저 살인범은 미남이다"고 말할 수 없는 데에 상식의 일면이 있다며 헤겔은 야유했지만, <나쁜남자>같은 무례한 영화를 '선/악' 이외의 형용사로 평가하기란 맘처럼 쉽지 않다. 배덕하다는 이유로 예술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관객에게조차 말이다. 수긍하기 힘든 내러티브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놓는 품으로 보아 김기덕 감독 자신이 관객의 불쾌를 의도했거나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말할 것도 없이 김기덕 영화는 특히 여성관객에게 더 큰 불쾌감을 준다. 매춘행위를 통해 계급갈등을 극복하고 여성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황당한 발상을 드러내는 <파란대문>까지 보고 나서, 여전히 김기덕 감독을 지지할 수 있을만큼 관대한 여성이 몇명이나 있을까? 동시에 김기덕 영화 내러티브의 극한성은 그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여성관객은 안중에도 없는 천하의 '마초'가 아니라, 당대의 상식에 인정받지 못하여 예술적 수난을 겪어야하는 천재적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쁜남자>는 그만큼 흥미로운 텍스트다. 평가는 극을 달리고 보고난 관객은 다들 한두마디씩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소재의 부도덕성에서 용케 긁어낸 이 영화의 감동에 무작정 환호하거나 난처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타당한 해석없이 휘황한 자극에만 이끌려 비난 혹은 찬사의 열광속에 빠지는 관객은 무언가 놓치고 있거나 아니면 감독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나쁜남자>의 부도덕함에 대해 성토하지만, 감금과 겁간 후에 사랑에 이른다는 내러티브는 사실 낡고 진부하다. 그것은 뮤지컬 <7인의 신부>의 로맨틱 무드에서 <박싱 헬레나>의 에로틱 고어 버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되었고, '강간이 화간으로 끝나는' 수많은 에로영화의 모티브로 차용되기도 했다. 영화 곳곳에 장치된 납치범을 위한 면죄부적 설정도 이런 영화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특히 김기덕 감독은 이전 영화와는 달리 <나쁜영화>의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구원하고 호감가는 캐릭터로 창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대중적 성공과 관객기만의 핵이다.




김기덕 이전 영화의 장점은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안이하게 신파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전 영화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삼켜질지언정 씹히지는 않겠다는 듯한 견고함으로 자신의 심중을 감춘 채 어두운 욕망의 기운만을 뿜어냈다. 관객은 그들에게 쉽게 동화할 수 없었으며 해석되지 않는 그들의 존재감은 영화가 끝나도 오랫동안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쁜남자>의 한기(조재현 분)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다. 한기를 위험하지만 순수한 욕망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로 창조하려는 감독의 속셈은 너무 노골적이다. 게다가 그 방법은 얼마나 진부한지 보는 내가 다 낯뜨겁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술에 취해 잠든 선화(서정 분)를 차마 범하지 못하는 한기의 떨림 뒤로 자장가 풍의 음악이 깔리며 그의 순수성을 암시한다. 자신에게 흡족하지 않은 상대와의 매춘으로부터 선화를 보호하기 위해 (포주인 그가!) 칼부림도 마다않는 '낭만적' 행동도 불사한다. 잦은 접사로 관객의 시선을 배우들의 감정서린 얼굴 위에만 머물도록 강요한다. 아버지 간병하라며 거액의 매춘대금을 선뜻 내놓고, "깡패가 무슨 사랑이냐"고 절규하는 장면에 이르면 급기야 60년대 청춘의협물 분위기까지 연출되는 것이다.




한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기 위한 감독의 조잡한 의지는 한기의 성욕과 관련하여 가장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난다. 포주인 한기는 어쩐일인지 금욕적이고 선화의 매춘장면을 훔쳐보며 흥분하는 대신 죄책감을 느낀다. 사창가라는 선정적 공간에서 에로티즘이 포주인 한기를 비껴가는 이 기묘한 설정은 선화를 향한 한기의 순수한 열정을 증명하고 강조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에 다름아니다.




'한기 호감가게 만들기'의 이 모든 수고로움의 효과는 분명하고도 위험하다. 성적 착취의 주범이 심정적으로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다. 강간을 일삼는 <악어>의 악어(조재현 분)와 달리, 사정이야 어떻든 강간만은 하지 않는 한기라는 캐릭커는 한결 수긍할만 했고, 그 결과 관객 60만이 이 난폭한 성적 판타지에 동참했다.




그러나 미학적 유치함과 위험천만한 설득력을 읽어낸 후에라도 <나쁜남자>를 온전히 거부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이 영화가 남녀간의 사랑이나 욕망에 관한 '진실'을 담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어떤 남성관객은 "거울 뒤에 내 모습(홍은철, 프리미어지紙)"을 발견하고 이 영화가 "잠재된 욕망과 심리를 설득력있게 묘사"했다며 감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남성만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여성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진실이 진실일 수 있다면, 딱 음담패설과 성희롱만큼만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쁜남자>가 온통 거짓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엔 포주와 사랑에 빠진 매춘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신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만 왜곡시킬 뿐이다." <나쁜남자>라는 신화 역시 자의에 따라 선택된 기호론적 과장으로 꾸며낸 담론일 뿐이다.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두자. 지난 1월 군산에선 인신매매각서 때문에 매춘부가 되어 포주에 의해 감금당한 채 윤락을 강요당하던 14명의 '선화'들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의 방식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3/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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