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4093-00.jpg

오아시스 ★★★
이창동  2002  
naver

[ 딴지일보 온라인 검열우원에 지원하기 위한 revised version입니다.]

이창동의 영화는 어딘지 불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나 김기덕 만큼은 아니지만요. 캐릭터들의 애처러운 일생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감동 비슷한 게 가슴 한 켠을 채우니 말입니다. 하지만 짧은 감동 뒤엔 으례 기묘한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초록물고기의 한석규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친구의 유오성도 불쌍해야 하고(물론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는 남.자.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박하사탕의 설경구를 용서할 수 있다면 이근안도 용서해야하는게 아닐까요? 범죄자적 인간형 내면에도 순수함이 있다/있었다는 모티프에 어느새 관객까지 동의하게 만드는 재주는 놀랍지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惡人의 정해진 말로가 관객의 역사적 죄의식을 자극하는 수난극으로 변신하고 마는 상황은 수상쩍은 불쾌감을 줍니다. 깡패는 깡패고 고문기술자는 고문기술자고 강간범은 강간범일 뿐인데! 물론 캐릭터의 예기치 못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내러티브가 반전의 묘미를 갖게 하고 영화 해석에 여러 층위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게다가 예컨대 '박하사탕'이 5,6공 인물들의 정치적 복권을 기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피해망상적 분노에 시달리느니, 이근안도 어쩌면 시대의 희생양일지 모른다는 가공할 상상도 가능케하는 영화의 힘에 탄복하며,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진보에 뿌듯해하는 편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惡人 옆에 서서 그들을 위해 굳이 눈물까지 흘려주고야 마는 감독의 변태적 취향은 여전히 의아하지만.

남은 문제는 영화의 개연성이 갖는 설득력입니다. '박하사탕'의 시간역행적 구조는 감독의 심중을 수상쩍어하는 의심많은 관객과, 설경구의 눈물에 같이 눈물흘린 속좋은 관객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정서적 공감을 갖게 만들었더랬죠. 역사의 폭력에 망쳐진 個人史는 가해자에게조차 비참하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오아시스'의 경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혹한 수난을 겪는 이 '고난받는 연인들'의 이야기 역시 그의 이전 영화들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오아시스'가 비극적이라면, 전과자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전과자와 장애인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가 없고, 단지 변태적인 성욕이나 '자괴감'에 기인한 자기파괴적인 사랑만이 있을 수 있다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도 공주와 종두는 순수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합니다. 그 둘을 괴롭히는 편견을 자기안에 조금씩은 갖고 있고, 극장 밖에서는 그 둘과 달리 계산적이고 덜 순수한 사랑을 하는 관객들은, 그래서 이 영화에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불편한 관객들에게 감동까지 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감동 받기 위해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던 그 편견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다른 편견에 동의해야 한다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장애인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윤리의식과 수치심과 성욕이 있다는 편견.

공주가 장애인이 아니라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에 '지영'같은 캐릭터였다면 이 영화의 감.동.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까요? 공주가 장애인이 아니라 집도절도없이 고학하는 천애고아 여대생이었다면 이 영화는 아마 김기덕의 '파란대문' 정도의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상식적인 윤리의식과 수치심을 가진 여성이라면 자기 아버지를 뺑소니치고 자신을 강간하려던 범죄자에게 '외로움' 때문에 전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말이 된 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주는 일반인이 아니라 1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종두에게 전화걸 수도 있다는 편견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공주와 종두의 사랑이 없다면 이 영화의 감동도 있을 수 없고, '1급 장애인 여자는 일반적인 여자와는 다른 윤리관 속에서 산다'는 편.견.이 없다면 그 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동도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주가 설경구에게 전화걸기 전에 공주가 어쩔수없이 이웃집 부부의 성교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주는 성욕을 느꼈을지 모른다라고 관객이 해석하기를 의도한 거라면, 진지한 척하는 영화의 품새와는 달리 사실 이 영화는 에로영화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강간과 함께 성욕에 눈뜨고 결국 강간범을 사랑하게 된다는 에로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답습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세상에는 부친살해 강간범을 사랑하는 장애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포주와 사랑에 빠지 는 접대부(나쁜남자)도 있을 수 있듯이.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내키는대로 아무 이야기나 지껄여댄다면, 예컨대 자신을 강제로 끌고 온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진 위안부를 다룬 영화같은 것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건이 실제 역사속에서 벌어졌을 확률이 물론 zero는 아닐테지만, 우리는 무척 분노할 것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데 왜 하필 그런 거지같고 예외적인 소재를 끌어들이는지, 감독의 역사관과 사고회로가 역겹기 때문이지요.

이창동이 차라리 김기덕처럼 위악적인 방식으로 '오아시스'를 만들었다면, 전 물론 그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테지만, 적어도 기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창동은 관객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가능한 감동에 기대어, 바로 그 편견이 만들어내는 비극에 관객들이 불편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야'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왜 그 둘의 사랑이 굳이 강간으로 시작해야 합니까? 아마 이창동은 공주와 종두의 사랑에 관객들이 쉽게 공감하기를 바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종두같은 거지같은 인생에게도 진실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혹은 사랑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관객이 깨닫기를 바라며,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종두를 인간쓰레기로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식의 방법론을 차용하느냐는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지만, 아니나다를까, 한국의 숫컷 감독답게, 이창동이 끌어들인 소재는 강간입니다. 강간은 정말 손쉽고, 어이없게도, 관객들도 쉽게 용납해주는 무난한 소재이지요. '사랑한다는데 강간이 대수냐'는 관대한 공감대가 '나쁜남자'에 감동한 수많은 남/녀 관객들 사이에서 확인되었지요. 성범죄율 세계 1위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강간이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데 진실한 사랑에 성공한 강간에 대해 무슨 비난의 말을 쏟아내겠습니까? 게다가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요. 한해에 (신고된) 강간만 6700여 건인데, 기껏해야 장.애.여.성. 한 명 강간하는 게 대수겠습니까? 그것도 그녀에게 진실한 사랑을 가능하게 만든 강간인데?

사실 종두는 인간말종이지만 강간범은 아닙니다. 강간미수지요.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말랑말랑한 캐릭터 중 하나인 한기가 결코 선화를 강간하지 않는 것처럼, 이창동도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게 냅두지 않습니다. 이건 아마도 이 영화를 낭만적 사랑에 관한 영화로 보고 싶어하는 (여성)관객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에게 강간과 진실한 사랑은 양립할 수 없으니까요. 공주에게 가해진, 물론 그녀를 결정적으로 망가뜨리지 않고 종두에게도 용서받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실패한 강간은, 말하자면 진실한 사랑에 이르는 고난의 길입니다. 계모의 모진 행패나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성이나 야수의 외모처럼, 사랑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그런 고난말이죠. 그러고나면 씨네21의 여성 평론가 심영섭의 말처럼 "진흙창에 서도 민들레는 피어난다 ★★★★☆"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랑 비슷한 놈 수두룩한데 왜 나만 갖고 그래,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를 김기덕 감독과, 피해자가 지독히 외로운 장애여성이 아닌 탓에 자기에게 전화를 안해, 진실한 사랑으로 그의 범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불운한 강간미수범들. 그들에게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2002/9/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