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Days Later... 28일 후 ★★★☆
Directed by Danny Boyle
imdb    듀나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지요. 전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대니 보일이 만든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의 최근 영화 <인질>이나 <비치>보다는 훨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근사한 '좀비'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좀비'영화라고 구분짓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좀비'가 '걸어다니는 시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infected들은 좀비가 아니지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뿐이지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까요. 좀비의 생태학도 이들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비감염자를 공격하는 이유는 좀비 특유의 '허기'가 아닙니다. 그들을 감염시킨 바이러스의 원천이었던 원숭이에게 실험용으로 주입된 '공격성' 때문입니다. 또 아무때나 돌아다니는 전통적인 좀비와 달리 이 infected들은 이상스럽게도 낮엔 자고 주로 밤에 돌아다닙니다. 만약 이 infected들을 좀비로 분류할 수 있다면 역대 최강의 좀비군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느릿느릿 걸어다녀 발만 빠르다면 대충 피할 수 있을 것같은 전통적인 좀비와 달리, 이 infected들은 정상인에 버금가는 운동력을 보여줍니다. 저렇게 빨리 뛰어다니는데다가 숫자까지 많고보니, 어떻게 배겨낼 수 있겠습니까?

이 영화를 '좀비영화'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는,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는 좀비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 발빠른 infected들은 충분히 공포스러운 존재이지만, 세 명의 주요인물 Jim, Selena, Hannah가 처하게 되는 가장 큰 공포는 좀비들이 아니라 비감염자들에 의해 조장됩니다. Henry소령이 말한 것처럼, 바이러스가 퍼진 이후의 세상은 인간(좀비가 아니라)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역사시대 이래 지속되어온 인간 세상의 룰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것일 뿐입니다. 막강한 야수가 호시탐탐 원시인을 노렸던 석기시대와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이 영화의 재현된 석기시대에서 총과 조직이라는 파워를 지닌 일군의 군인들은 역시 석기시대의 원시인들처럼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고 계획합니다. 결국 지뢰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견고한 요새는 야만과 원시성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자신의 '암컷'을 지키려는 Jim의 압도적이고 원시적인 분노앞에 자동소총은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고보면 이 영화가 뭔가 심각한 주제를 말하려나보다,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Jim 일행이 대형할인매장에서 물건을 카트안에 쓸어담는 장면에서, 감독은 자본주의의 규칙을 위반하는 대리만족을 관객들이 느끼도록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지 로메로의 에서 좀비가 되고도 쇼핑이라도 하듯 백화점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풍자하던 그런 예리함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감독의 조국인 영국에 대한 혐오와 절망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국가 자체의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후 외부(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영국이 바다로 격리된 탓에 바이러스의 전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다른 국가)로부터의 지원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할 만큼 영국에 염증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감' 관점에선 썩 만족스런 영화는 아닙니다. 인육으로 배를 채우는 것도 아닌 저 감염자들은 조만간 굶어죽을 것이라는 점이 영화의 진행과 함께 점점 뚜렷해지고, 남은 문제는 감염자들이 다 죽을 때까지 견뎌내는 것 뿐입니다.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나 최근의 <레지던트 이블>처럼, 세상이 이전상태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절망감이 이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지요. 디지털 카메라의 낯선 질감은 감염자들의 얼굴을 무척 사실감있게 느끼게 하지만, 감염자들이 비감염자를 공격하는 장면에서는 사지절단이나 내장적출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대신 카메라는 버드 아이 뷰의 위치로 물러나버려 좀 심심해집니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마지막에 이 잔인한 현실에서도 꽃피는 '사랑'이라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기껏 이렇게 끝낼 생각이었더란말이냐, 잔뜩 기대하고 있던 호러팬들을 실망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밌습니다. 좀비영화임을 앞세워 호러팬을 유혹함과 동시에 여러 층위의 의미로 해석가능한 내러티브, 그리고 사랑의 완성과 해피엔딩이라는 상업적으로 안전한 결말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영악한 영화입니다.  (2003·08·22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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