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 ★★★★
감독 박기복
naver

대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동기중에 피부가 무척 험한 녀석이 있었습니다. 뽀드락지 같은 것이 얼굴 전체를 뒤덮었고, 그 뽀드락지가 터진 자리는 마치 운석이 떨어진 구덩이처럼 뚜렷한 흉터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온갖 피부연고를 뒤집어쓴 피부는 검은듯 붉었으며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듯한 피부는 보고 있노라면 좀 속이 불편해집니다. 이후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제대한 후 다시 만난 그 친구의 피부는 거의 정상인의 것과 다름이 없을만큼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1학년 때는 이 녀석,  자신의 피부에 대해 무척 많은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기숙사 제 방에 그 친구와 다른 여자 동기 한 명이 놀러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녀석의 피부병이 화제로 올랐습니다. 당연히 그 녀석은 온갖 치료를 다 받아보았으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답니다. 그 이야기에 좀 안타까와진 저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다면 '굿'이라도 해보는 게 어때?"라고 말했지요. 저는 진지하게 말했고 사실 진지했습니다. 제 동기들의 어이없어하는 표정과 쏟아진 핀잔은 쉽게 짐작이 가시죠? 저는 과학기술의 첨단을 걷고 있는 공과대학의 학생이었지만, 가까운 친척분 중에 무당이 계셨기 때문에, 무당이 매개하는 무속의 세계 또한 퍽이나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굿'이라는 방법이 어떤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온 사례-인과관계는 불분명하더라도-를 여럿 알고 있었습니다. 무속신앙은 제가 보내온 유년,청소년기의 여러 기억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었던 것입니다.

동기녀석들의 핀잔 이후,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저는 무속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을 의식적으로 배척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아주 공대생다운 방식으로 무속신앙을 이해하려고 작정한 것이었지요. 무속신앙은 전근대사회의 무지를 드러내는 가장 전형적인 예이고,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더욱 철저히 근대화-과학화,합리화-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당들이 보여주는 빙의현상은 일종의 환각상태일 뿐이며, 근거없는 협박으로 무지한 사람의 돈을 욹어먹는 행위는 사기나 다름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이퍼텍 나다에서 <영매>라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만, 도통 관심이 가질 않았습니다. TV에서 여름만 되면 방영하는 무슨 얼토당토않은 괴담같은 것들과 다를바가 뭐 있으랴, 싶었거든요. 지난 목요일, 볼만한 영화가 한 편이라도 있었으면, <영매>를 보러가지 않았을거에요.

게다가, 짐짓 객관적인 듯 포장하지만 결국엔 뻔한 의도가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변영주의 <숨결> 마지막 씬, 위안부로 끌려간 후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평생을 마쳐야했던, 어느 한많은 인생을 산 할머니가 나오지요. 카메라는 그 할머니의 늙을대로 늙어버린 나신을 천천히 훑으며, 관객들이 그 깊은 주름과 어두운 살빛에서 역사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해온 폭력을 기억하라고 강요합니다. 인상적인 장면이었지만, 너무 노골적이죠. 그 장면의 의도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세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함에서 문득 감독의 끓는 분노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다큐멘터리라면 감독은 어디까지나 냉철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분노는 관객인 제가 느끼도록 해야하는데 말이죠.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는 더 심하죠. 차라리 화를 내고 말일이지, 이 인간은 계속 빈정대다가 애꿎은 사람 하나 앉혀놓고 온갖 오버된 감정을 쏟아냅니다. 차라리 <의지의 승리>같은 프로파겐다 영화가 더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 <영매>도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감독은 세습무 혹은 강신무 개개인의 고단한 일생을 감상적으로 포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만한 연세를 드신 분들 중에 사연없는 인생을 사신 분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영화 초반 15분 여를 장식하는 포항 풍어제는 분명 이 다큐멘터리의 민속지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지만, 영화의 나머지 부분들과 비교해보면 일관성이 없이 따로 노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이후는 <이것이 인생이다>의 극장판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신무 박미정이 비명횡사한 아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벌인 굿 장면에서 전 몇년만에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와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은 어린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굿'이라는 형식을 통해 '삶'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한 감동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 강신무는 단지 환각에 취해 있었을뿐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굿판이 절정에 이르고 강신무가 죽은 아들의 행세를 하며 슬퍼하는 어미와 가족을 달래는 순간이 되면, 그 '빙의'현상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장소에 있던 그 누구도 그 강신무에 죽은 아들의 혼이 들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런 믿음의 단계를 통해 그들은 응어리진 한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슬픔에서 그들을 끌어내고 다시 삶의 의지를 복둗어주고자 하는, 선의에 찬 간절한 희망인 것이지요.

무당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사람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굿과 무당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들을 보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위안을 받으며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과학이라는, 편협하고 완고한 세계관으론 해석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좋은 책이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만들 듯이, 좋은 영화도 그러합니다. 교육적인 효과에 있어서나 감동의 깊이에 있어서나 정말 좋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2003·09·29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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