極道三國志 不動 극도삼국지 후도 ★★★☆
감독 미이케 다카시 1996

이 재밌는 걸 혼자서 봐서 죄송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이 영화를 보게 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이케 다카시는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감독인데다 우리나라의 심의 기준도 점차 완화되고 있는 추세기 때문에, 한 십 년쯤 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영화를 DVD(그때쯤이면 VHS는 역사속 유물이 되겠지요)나 다른 어떤 차세대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이 영화가 국내에 수입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군요. <비지터 Q>나 <오디션>, 혹은 시리즈 같은 그의 대표작들과는 다른 완성도를 갖고 있는, 즉 막 찍어댄 이 어설픈 비디오용 영화는 아마도 그의 영화 개봉 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보시기 힘들 것입니다. 전 봤지만. 죄송합니다.

전 미이케 다카시 영화의 광팬입니다만, 그동안 저를 열광시켰던 그의 영화들은, 말하자면 그가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영화였나봅니다. 반면 이 영화는 한 해에 열 편 이상찍는다는 그의 제작 방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입니다. 극적 개연성은 거의 없는데다 대충 쇼킹한 눈요깃감으로 시간을 때웁니다. 양성구유인간이 생리혈을 무기처럼 뿜어대고 한국사람으로 소개된 특수요원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난데없이 '김치'를 담그고 일본식 기무치에 분개하여 식당에서 행패를 부립니다. 조잡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매력적인 영화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적어도 'V씨네마'가 목적하는 바, 이삼십대 성인 남자들이 보고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영화입니다. 정확히 타겟팅된 특정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장면들을 여한없이 보여주겠다는 그 노골적인 목적의식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미덕인 것입니다. 아무도 이 영화의 작품성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타켓팅된 관객층은 이 영화가 재미없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지간에 저는 여전히 미이케 다카시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2003·06·04 00:22)

 

Bowling for Columbine 볼링 포 콜럼바인 ★★★

Directed by Michael Moore
imdb    듀나

이 영화가 친절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신나간 나라'라는 미국관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머릿속에 갖고 있었다. 히스테릭한 패닉과 전체주의적 애국주의에 휩쌓여 최소한의 이성마저 상실하기 전에도, 미국이라는 깡패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다른나라에 저지르고 다니는 일들은 미국을 미친나라로 규정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겐 이 영화가 쇼킹했는지 모르겠지만, 군수산업과 미디어, 정치권에 의해 확대재생산되는 공포, 피로 점철된 미국사, 미국이 약소국에 저지르는 학살 같은 건 무척 익숙한 얘기다. 적어도 미국의 핵전쟁 협박에 그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극동의 힙없는 나라의 국민들에겐 말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단지 최소한의 관심만으로도 진작에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거나 대중매체가 조장하는 환상에 놀아나 속아왔던 사람들에게 미국이라는 사회의 광기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다는 점일 것이다.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자기모순'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한편 이 영화는 때때로 억지스런 연출로 다큐로서의 진정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특히 찰튼 헤스턴의 집 현관에 총기사고로 죽은 6살난 여자아이의 사진을 놔두고 오는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진부했다. 마치 이라크에서 교전중에 죽은 자식의 사진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미국 엄마를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방법론 아닌가? 프로파겐다를 전파하는 보다 세련된 방식이 없지 않을텐데, 뭣때문에 그런 노골적인 방식으로 총기애호가에 대한 총기비애호가의 분노를 증폭시키거나 조장하려 한 것일까? 심증만으로 무리해서 말한다면 마이클 무어는 자신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인지 신랄한 척하는 코미디의 광대인지 헷갈리는 듯하다. 인터뷰는 인터뷰 대상의 맨텔러티와 그에 미친 사회의 영향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희생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 눈엔) 과장되어 보이는 위로의 말을 던지는 감독의 자기과시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 WGA은 이 영화에 다큐멘터리에 대해선 처음으로 각본상을 주었다고 한다. 다큐가 각본상이라니, 뭔가 수상한 조합 아닌가?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거나 한심해보이는 건 찰튼 헤스턴을 몰아부치는 마지막 장면이다. 찰튼 헤스턴은 총이 있어야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단지 멍청할 뿐인 백인일지도 모른다. 마틴 루터 킹과 행진을 같이 하며 민권운동가로도 활동했다던 그를, 6살 여아의 총기사고 직후 그 도시에서 총기소유찬성 집회를 열만큼 파렴치한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차라리 비열에 가까운 횡포다. 그는 정말 그런 비극적인 사고가 있었는지 나중에야 알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마이클 무어가 좀 더 용기가 있었거나 보다 정직하게 (효과적으로가 아니라) 총기를 둘러싼 미국인의 광기를 고발하고 싶었으면, 찰튼 헤스턴이 아니라 로키드 마틴사의 회장이나 총기소유억제를 적극 반대하는 정치가나 하다못해 거대 미디어 그룹 임원과의 인터뷰로 영화를 끝마쳤어야 했다. 마이클 무어의 방법론은 '위험한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확대재생산한다며 그 자신이 비난해마지 않는 < COPS > 라는 TV 프로그램 제작자와 다를 바 없다. 8백억달러를 횡령한 거물보다 80달러 소매치기를 검거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편이 더 제작가능성이 있으며 TV쇼로서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그 TV제작자처럼, 마이클 무어는 왕년의 인기스타를 닥달하는 편이 이름도 몇번 들어본 적없는 세계 최대 무기제작 그룹의 회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보다 훨씬 현실성있고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하긴 마이클 무어의 전작 < Roger and Me > 에서 하소연한대로 거대 그룹의 회장을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었을테다. 하지만 이건 파병을 찬성하는 자유시민연합 소속 戰前세대에게 당신이 도대체 인간이냐며 몸싸움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정작 따져야할 곳이 아니라 손쉬운 상대니까 붙잡고 늘어지겠다는 시도는 고작 멍청할 뿐이라는 잘못에 대해선 가혹하다 할만한 처사일 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다. 게다가 마이클 무어가 찰튼 헤스턴을 타겟으로 삼은 건 단지 컨택이 쉽기 때문 이상의 영악한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마쵸한 이미지의 노쇠한 백인 영화배우라니,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여러모로 갖추고 있지 않은가?

뭐 어쨌거나 좋다. 미국은 정신나간 나라,라는 고백을 미국인 입으로 듣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누가 물어오면 나는 한동안 이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
2003·05·24 15:24)

 

Lord of the Rings: The Two Towers, The 반지의 제왕 ★★★☆
Directed by Peter Jackson
imdb

노바리님이던가가 이 영화 무슨 성에서의 전투씬을 캐네스 브레너의 <헨리 5세>에서의 전투씬에 버금가는 명장면이라 하셨더랬다. 굉장한 장면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수만의 개체들이 엉켜 베고 자빠지고 울부짓는 장면은 우선 그 압도적인 스케일 덕에 어떤 장엄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규모의 전투씬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일년을 기다린 수고로움에충분히 값한다. 하지만 그게 다다. 1편 때의 판단유보가 2편을 보고나선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조바심내며 기대했던 걸.작.의 등장은 <반지의 제왕>에 대해선 물건너간 바램이다. 덩치 큰 활극일 뿐이다.

톨킨의 원작을 읽지 않았다. 판타지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거창한 찬사에 주눅들지 말고 피터 잭슨의 영화만으로 평가해본다면, 대단할 게 없다. 대마왕의 손에서 니나를 구하기 위해 버섯돌이와 고군분투하는 <이상한 나라의 폴>의 공간이, 프로도와 간달프 패거리가 갖은 고생을 하는 <반지의 제왕>의 공간과 어떤 질적 차이가 있는지 (양적 차이가 있다는 건 자명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아무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해도 절대악, 인간의 나약한 의지, 악의 대리인, 봉건적 세계관, 영웅사관 같은 코드들은 유치하거나 진부해보일 뿐이다. 주요인물들 중 누구도 죽지 않는 2편에선 하다못해 비장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웅본색>주윤발의 총질을 연상케하는 일당백의 내공은 일말의 리얼리티는 고사하고 보는 사람 어이없게 만들기 일쑤다. 하다못해 간달프의 백마까지 개폼잡기에 가담한다. 그 백마가 오버질하는 음악에 맞춰 등장하는 슬로우모션에선 주성치의 <도성>이 연상되더라. 웃자고 만든장면은 아닐텐데.

저런 흰소린 집어치우자. 시체 수천 구가 나뒹굴어도 내장 하나 보여주지 않는 피터 잭슨은 더이상 왕년의 고어제왕이 아니라는 실망 때문에 공연한 시비를 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는 장면도 분명 있다. 사우론을 추종하는 어떤 종족이 코끼리 몇마리를 이끌고 진군하는 걸 어떤 기마병들이 습격하는 장면이 있었다. 인간이나 요정이나 하나같이 백인뿐인 <반지의 제왕>의 세계에서 유독 그 악의 무리만이 아랍인의 형상이다. 저런 부시적인 상상력이 피터 잭슨 자신의 것인지 정치적 보수주의자였다던 톨킨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같은 톨킨'안'매니아에겐 개수작으로 보일 뿐이다.

대사있는 유색인종이 하나도 안나와도 난 우디 알렌의 팬이다. 유치뽕짝이래도 열라 재밌기 때문에 내년에도 <반지의 제왕>을 볼 것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이 피터 잭슨의 영화이고 톨킨의 작품이라면 이거 실망이 아닐 수 없다. (2003·01·14 2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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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감독 6인전'이란 영화제를 보러갔다. 대구까지.

무료상영인데도 역시나 관객이 거의 없었다. 포항서 대구까지 영화보겠다고 찾아간 나는 미친놈인가?

효자씨에게 좀 더 맛있는 걸 사멕이지 못해 가슴이 아팠다.

이마무로 쇼헤이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작은 오빠는 범작. 비참을 빌미로 눈물을 쥐어짜지는 않았다. 주인공 가족은 조센징. 문디가시나야,라는

대사도 있었다. 미국놈들이 요즘에도 이루지 못한 리얼리티를 이마무라 쇼헤이는 40여년전 이뤄냈다.

돼지와 군함은 보다가 20분쯤 졸았다. 점령군에게 학살당한 경험도 없는 주제에 점령상황에 대한 풍자

가 날카롭다. 수백마리의 돼지떼가 거리를 메우는 마지막 씨퀀스는 장관이다. 주인공 남자가 애인이

미군들에게 겁간을 당한 사실을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장면은 놀라왔다. 조선 같았어봐, 바로

자살했을거야, 저 여자. 일본 남자들에게는 동족 처녀의 순결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수치심 자체가 없

거나 희박한 것 같다. 여성으로선 어느쪽이 더 살기 좋은 나랄까, 일본, 조선? 당연히 일본일테다.

일본 곤충기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수작. 곤충같은 삶.

붉은 살의도 보려 했으나 버스를 놓칠 것 같아 못봤다.

연속 세 편 보고 있자니 머리가 뽀개질라고 했다. (2002·12·27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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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오빠 にあんちゃん (1959)


감독: 이마무라 소헤이今村昌平
각본: 이케다 이치로池田一朗, 이마무라 소헤이今村昌平
촬영: 히메다 신사쿠姬田眞佐久
출연: 나가토 히로유키長門裕之 , 마츠오 가요松尾嘉代, 기타바야시 다니에北林谷榮  
상영시간: 101분 / 흑백

줄거리
석탄 산업의 불황기였던 1954년경,
궁핍한 한 탄광을 무대로 밑바닥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4명의 형제자매인
키이치, 요시코, 스에코 그리고 타카이치(작은오빠)에 관한 이야기이다.
4형제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웃의 헨미씨는 장남인 키이치를 임시직에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달라고 탄광회사 간부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키이치와 같은 조센징은 첫 번째 정리해고 대상이다.
결국 키이치가 일자리 마저 잃게 되자 그 가족들은 탄광의 사택에서 쫓겨날 처지가 된다.
헨미씨의 도움으로 잠시 그의 집에 의탁할 수 있게 되지만 곧 그들은 생계를 위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돼지와 군함 豚と軍艦 (1961)


감독: 이마무라 소헤이今村昌平
각본: 야마우치 히사山內久
촬영: 히메다 신사쿠姬田眞佐久
출연: 나가토 히로유키長門裕之, 요시무라 지츠코吉村實子, 미나미다 요코南田洋子, 미시마 마사오三島雅夫
상영시간: 108분 / 흑백

줄거리
이 영화는 야쿠자들이 미군 기지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돼지를 길러서 일확천금을 노린다는 설정의 희극이다.
주인공은 그런 야쿠자 조직의 말단으로 이 새로운 사업이 성공했을 때
지급될 예정인 15만 엔의 보너스를 위해 돼지 기르기에 열심이다.
그러나 야쿠자와 미군 사이에 끼어 든 수상한 브로커로 인해
예상 밖의 자금들이 추가로 들어가게 시작하면서 그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다.
급기야 브로커가 거금을 횡령해 달아나자 그들은 좌절에 빠진다.  

일본 곤충기 にっぽん昆蟲記 (1963)


감독: 이마무라 소헤이今村昌平
각본: 하세베 게이지長谷部慶次, 이마무라 소헤이今村昌平
촬영: 히메다 신사쿠姬田眞佐久
출연: 아이자와 에미코, 하루가와 마스미, 히다리 사치코左幸子, 히가시 에미코
상영시간: 123분

줄거리
1900년대 초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한 여자의 인생유전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그녀가 태어나는 날에 시작해서 그녀가 손자를 갖게 되는 날로 끝난다.
영화의 제목 <일본곤충기>는 사랑이나 도덕보다는
오직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곤충의 행동양식에서 비롯되었다.
주인공은 도메는 자기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녀는 도덕성이 결여된 많은 인물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녀의 삶은 늘 비극과 착취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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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
이창동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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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일보 온라인 검열우원에 지원하기 위한 revised version입니다.]

이창동의 영화는 어딘지 불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나 김기덕 만큼은 아니지만요. 캐릭터들의 애처러운 일생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감동 비슷한 게 가슴 한 켠을 채우니 말입니다. 하지만 짧은 감동 뒤엔 으례 기묘한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초록물고기의 한석규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친구의 유오성도 불쌍해야 하고(물론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는 남.자.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박하사탕의 설경구를 용서할 수 있다면 이근안도 용서해야하는게 아닐까요? 범죄자적 인간형 내면에도 순수함이 있다/있었다는 모티프에 어느새 관객까지 동의하게 만드는 재주는 놀랍지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惡人의 정해진 말로가 관객의 역사적 죄의식을 자극하는 수난극으로 변신하고 마는 상황은 수상쩍은 불쾌감을 줍니다. 깡패는 깡패고 고문기술자는 고문기술자고 강간범은 강간범일 뿐인데! 물론 캐릭터의 예기치 못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내러티브가 반전의 묘미를 갖게 하고 영화 해석에 여러 층위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게다가 예컨대 '박하사탕'이 5,6공 인물들의 정치적 복권을 기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피해망상적 분노에 시달리느니, 이근안도 어쩌면 시대의 희생양일지 모른다는 가공할 상상도 가능케하는 영화의 힘에 탄복하며,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진보에 뿌듯해하는 편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惡人 옆에 서서 그들을 위해 굳이 눈물까지 흘려주고야 마는 감독의 변태적 취향은 여전히 의아하지만.

남은 문제는 영화의 개연성이 갖는 설득력입니다. '박하사탕'의 시간역행적 구조는 감독의 심중을 수상쩍어하는 의심많은 관객과, 설경구의 눈물에 같이 눈물흘린 속좋은 관객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정서적 공감을 갖게 만들었더랬죠. 역사의 폭력에 망쳐진 個人史는 가해자에게조차 비참하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묘사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오아시스'의 경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혹한 수난을 겪는 이 '고난받는 연인들'의 이야기 역시 그의 이전 영화들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오아시스'가 비극적이라면, 전과자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전과자와 장애인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가 없고, 단지 변태적인 성욕이나 '자괴감'에 기인한 자기파괴적인 사랑만이 있을 수 있다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도 공주와 종두는 순수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합니다. 그 둘을 괴롭히는 편견을 자기안에 조금씩은 갖고 있고, 극장 밖에서는 그 둘과 달리 계산적이고 덜 순수한 사랑을 하는 관객들은, 그래서 이 영화에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불편한 관객들에게 감동까지 주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감동 받기 위해선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던 그 편견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다른 편견에 동의해야 한다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장애인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윤리의식과 수치심과 성욕이 있다는 편견.

공주가 장애인이 아니라 예컨대 '고양이를 부탁해'에 '지영'같은 캐릭터였다면 이 영화의 감.동.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까요? 공주가 장애인이 아니라 집도절도없이 고학하는 천애고아 여대생이었다면 이 영화는 아마 김기덕의 '파란대문' 정도의 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상식적인 윤리의식과 수치심을 가진 여성이라면 자기 아버지를 뺑소니치고 자신을 강간하려던 범죄자에게 '외로움' 때문에 전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말이 된 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주는 일반인이 아니라 1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종두에게 전화걸 수도 있다는 편견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공주와 종두의 사랑이 없다면 이 영화의 감동도 있을 수 없고, '1급 장애인 여자는 일반적인 여자와는 다른 윤리관 속에서 산다'는 편.견.이 없다면 그 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동도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주가 설경구에게 전화걸기 전에 공주가 어쩔수없이 이웃집 부부의 성교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주는 성욕을 느꼈을지 모른다라고 관객이 해석하기를 의도한 거라면, 진지한 척하는 영화의 품새와는 달리 사실 이 영화는 에로영화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강간과 함께 성욕에 눈뜨고 결국 강간범을 사랑하게 된다는 에로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답습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세상에는 부친살해 강간범을 사랑하는 장애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포주와 사랑에 빠지 는 접대부(나쁜남자)도 있을 수 있듯이.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내키는대로 아무 이야기나 지껄여댄다면, 예컨대 자신을 강제로 끌고 온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진 위안부를 다룬 영화같은 것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건이 실제 역사속에서 벌어졌을 확률이 물론 zero는 아닐테지만, 우리는 무척 분노할 것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은데 왜 하필 그런 거지같고 예외적인 소재를 끌어들이는지, 감독의 역사관과 사고회로가 역겹기 때문이지요.

이창동이 차라리 김기덕처럼 위악적인 방식으로 '오아시스'를 만들었다면, 전 물론 그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테지만, 적어도 기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창동은 관객의 잘못된 편견 때문에 가능한 감동에 기대어, 바로 그 편견이 만들어내는 비극에 관객들이 불편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이런 게 진짜 사랑이야' 같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왜 그 둘의 사랑이 굳이 강간으로 시작해야 합니까? 아마 이창동은 공주와 종두의 사랑에 관객들이 쉽게 공감하기를 바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종두같은 거지같은 인생에게도 진실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위대하다는 것을, 혹은 사랑은 누구에게나 가능하고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관객이 깨닫기를 바라며,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종두를 인간쓰레기로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식의 방법론을 차용하느냐는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지만, 아니나다를까, 한국의 숫컷 감독답게, 이창동이 끌어들인 소재는 강간입니다. 강간은 정말 손쉽고, 어이없게도, 관객들도 쉽게 용납해주는 무난한 소재이지요. '사랑한다는데 강간이 대수냐'는 관대한 공감대가 '나쁜남자'에 감동한 수많은 남/녀 관객들 사이에서 확인되었지요. 성범죄율 세계 1위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인지 어쩐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강간이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데 진실한 사랑에 성공한 강간에 대해 무슨 비난의 말을 쏟아내겠습니까? 게다가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요. 한해에 (신고된) 강간만 6700여 건인데, 기껏해야 장.애.여.성. 한 명 강간하는 게 대수겠습니까? 그것도 그녀에게 진실한 사랑을 가능하게 만든 강간인데?

사실 종두는 인간말종이지만 강간범은 아닙니다. 강간미수지요.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말랑말랑한 캐릭터 중 하나인 한기가 결코 선화를 강간하지 않는 것처럼, 이창동도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게 냅두지 않습니다. 이건 아마도 이 영화를 낭만적 사랑에 관한 영화로 보고 싶어하는 (여성)관객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에게 강간과 진실한 사랑은 양립할 수 없으니까요. 공주에게 가해진, 물론 그녀를 결정적으로 망가뜨리지 않고 종두에게도 용서받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실패한 강간은, 말하자면 진실한 사랑에 이르는 고난의 길입니다. 계모의 모진 행패나 가시나무로 둘러쳐진 성이나 야수의 외모처럼, 사랑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그런 고난말이죠. 그러고나면 씨네21의 여성 평론가 심영섭의 말처럼 "진흙창에 서도 민들레는 피어난다 ★★★★☆"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랑 비슷한 놈 수두룩한데 왜 나만 갖고 그래,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를 김기덕 감독과, 피해자가 지독히 외로운 장애여성이 아닌 탓에 자기에게 전화를 안해, 진실한 사랑으로 그의 범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불운한 강간미수범들. 그들에게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200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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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
김기덕  2001  
naver

[ 딴지일보 온라인 검열우원에 지원하기 위한 revised version입니다.]

"저 살인범은 미남이다"고 말할 수 없는 데에 상식의 일면이 있다며 헤겔은 야유했지만, <나쁜남자>같은 무례한 영화를 '선/악' 이외의 형용사로 평가하기란 맘처럼 쉽지 않다. 배덕하다는 이유로 예술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원칙에 동의하는 관객에게조차 말이다. 수긍하기 힘든 내러티브를 자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놓는 품으로 보아 김기덕 감독 자신이 관객의 불쾌를 의도했거나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말할 것도 없이 김기덕 영화는 특히 여성관객에게 더 큰 불쾌감을 준다. 매춘행위를 통해 계급갈등을 극복하고 여성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황당한 발상을 드러내는 <파란대문>까지 보고 나서, 여전히 김기덕 감독을 지지할 수 있을만큼 관대한 여성이 몇명이나 있을까? 동시에 김기덕 영화 내러티브의 극한성은 그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여성관객은 안중에도 없는 천하의 '마초'가 아니라, 당대의 상식에 인정받지 못하여 예술적 수난을 겪어야하는 천재적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쁜남자>는 그만큼 흥미로운 텍스트다. 평가는 극을 달리고 보고난 관객은 다들 한두마디씩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소재의 부도덕성에서 용케 긁어낸 이 영화의 감동에 무작정 환호하거나 난처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타당한 해석없이 휘황한 자극에만 이끌려 비난 혹은 찬사의 열광속에 빠지는 관객은 무언가 놓치고 있거나 아니면 감독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나쁜남자>의 부도덕함에 대해 성토하지만, 감금과 겁간 후에 사랑에 이른다는 내러티브는 사실 낡고 진부하다. 그것은 뮤지컬 <7인의 신부>의 로맨틱 무드에서 <박싱 헬레나>의 에로틱 고어 버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되었고, '강간이 화간으로 끝나는' 수많은 에로영화의 모티브로 차용되기도 했다. 영화 곳곳에 장치된 납치범을 위한 면죄부적 설정도 이런 영화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특히 김기덕 감독은 이전 영화와는 달리 <나쁜영화>의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도덕적 비난으로부터 구원하고 호감가는 캐릭터로 창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대중적 성공과 관객기만의 핵이다.




김기덕 이전 영화의 장점은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안이하게 신파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전 영화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삼켜질지언정 씹히지는 않겠다는 듯한 견고함으로 자신의 심중을 감춘 채 어두운 욕망의 기운만을 뿜어냈다. 관객은 그들에게 쉽게 동화할 수 없었으며 해석되지 않는 그들의 존재감은 영화가 끝나도 오랫동안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쁜남자>의 한기(조재현 분)는 비현실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다. 한기를 위험하지만 순수한 욕망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로 창조하려는 감독의 속셈은 너무 노골적이다. 게다가 그 방법은 얼마나 진부한지 보는 내가 다 낯뜨겁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술에 취해 잠든 선화(서정 분)를 차마 범하지 못하는 한기의 떨림 뒤로 자장가 풍의 음악이 깔리며 그의 순수성을 암시한다. 자신에게 흡족하지 않은 상대와의 매춘으로부터 선화를 보호하기 위해 (포주인 그가!) 칼부림도 마다않는 '낭만적' 행동도 불사한다. 잦은 접사로 관객의 시선을 배우들의 감정서린 얼굴 위에만 머물도록 강요한다. 아버지 간병하라며 거액의 매춘대금을 선뜻 내놓고, "깡패가 무슨 사랑이냐"고 절규하는 장면에 이르면 급기야 60년대 청춘의협물 분위기까지 연출되는 것이다.




한기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기 위한 감독의 조잡한 의지는 한기의 성욕과 관련하여 가장 그로테스크하게 드러난다. 포주인 한기는 어쩐일인지 금욕적이고 선화의 매춘장면을 훔쳐보며 흥분하는 대신 죄책감을 느낀다. 사창가라는 선정적 공간에서 에로티즘이 포주인 한기를 비껴가는 이 기묘한 설정은 선화를 향한 한기의 순수한 열정을 증명하고 강조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에 다름아니다.




'한기 호감가게 만들기'의 이 모든 수고로움의 효과는 분명하고도 위험하다. 성적 착취의 주범이 심정적으로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다. 강간을 일삼는 <악어>의 악어(조재현 분)와 달리, 사정이야 어떻든 강간만은 하지 않는 한기라는 캐릭커는 한결 수긍할만 했고, 그 결과 관객 60만이 이 난폭한 성적 판타지에 동참했다.




그러나 미학적 유치함과 위험천만한 설득력을 읽어낸 후에라도 <나쁜남자>를 온전히 거부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이 영화가 남녀간의 사랑이나 욕망에 관한 '진실'을 담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어떤 남성관객은 "거울 뒤에 내 모습(홍은철, 프리미어지紙)"을 발견하고 이 영화가 "잠재된 욕망과 심리를 설득력있게 묘사"했다며 감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남성만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여성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진실이 진실일 수 있다면, 딱 음담패설과 성희롱만큼만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나쁜남자>가 온통 거짓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엔 포주와 사랑에 빠진 매춘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신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만 왜곡시킬 뿐이다." <나쁜남자>라는 신화 역시 자의에 따라 선택된 기호론적 과장으로 꾸며낸 담론일 뿐이다.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두자. 지난 1월 군산에선 인신매매각서 때문에 매춘부가 되어 포주에 의해 감금당한 채 윤락을 강요당하던 14명의 '선화'들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의 방식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3/1/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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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반지의 제왕 ★★★
Peter Jackso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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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은 읽어 본 적도 없고 읽을 생각도 없다. 톨킨이나마나 엘프니 마법사니 하는 것들이 나오는 소설을 정색을 하고 읽어낼 재간이 나한텐 없어서다. 하지만 개인적 취향에 관계없이 이렇게 흠잡을 데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1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감각소여 차원에서 실감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라. 1500억원이 알차고 요령있게 쓰여진다면 이런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피터 잭슨의 팬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 다소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반지원정대'가 혹시나 '배트맨'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 그렇지 못했다. 피터 잭슨은 소위 천재 감독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지만 막대한 예산의 블록버스터 안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수완있거나 제작자가 뭐라고 지껄이든지 간에 자신만의 영화세계에 몰두할 만큼 자폐적인 감독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면 그새 돈맛에 길들여 졌던지.

앞으로는 '반지의 제왕'의 감독으로 알려지겠지만, 사실 피터 잭슨은 몇 년 전만해도 'Brain Dead'나 'Heavenly Creatures'의 감독으로 알려졌었다. 둘 중 어느 영화의 감독으로 생각하느냐는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두 영화 모두 발칙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잔인한 유머로 장식된 뛰어난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브레인 데드'는 개인적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다. 막 복학하고 몇 년만에 찾아가 본 동방 캐비넷에 꽂혀있던 이 영화의 no-cut판! 날라다니는 머리들과 춤추는 내장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그 경이로운 도살씬! 억눌리고 주눅든 군생활의 기억과 뭐가뭔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복학생활의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영화가 있을까? '브레인데드'는 스플래터 무비가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었고 나는 이 영화에 열광했었다.

그 밖의 다른 영화들도 그의 별난 취향과 특이한 유머감각이 엿보이는 수작들이었다. '프라이트너'는 피터 잭슨의 영화치곤 너무 싱거운 게 로버트 저맥키스가 제작한 영화라는 것이 어쩔수없이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토브 후퍼가 스필버그와 손잡고 찍은 '폴터가이스터' 정도로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화史에 관한 뻔뻔한 의사다큐멘터리 'Forgotten Silver'는 (당연히) 평론가의 찬사를 얻어냈으며 영화 자체도 재밌었다. 하지만 이렇게 몇편의 영화가 연달아 성공했다고 해서 뉴질랜드 출신의 이 괴상한 감독에게 1억달러짜리 영화가 덜컥 맡겨진 것은 정말 영문모를 일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제작사의 탁견으로 판명되었지만 처음엔 어이없는 결정처럼 보였다. 이건 마치 '비틀쥬스'의 감독에게 '배트맨'을 맡기는 꼴 아닌가? 동시에 상황이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 영화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하나 '반지의 제왕'이 '브레인 데드'의 에픽 버전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거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영화적 사건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피터 잭슨은 왕년의 그의 광팬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지의 제왕'을 정.석.대로 연출했다.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지만 그 결과 피터 잭슨의 흔적은 하나도 안남은 영화로.


물론 이런 뛰어난 영화를 앞에 놔두고도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게 아니다'라고 지껄인다면 그건 단지 시대착오적인 객기일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예산이 커질수록 그 영화가 소위 '작가영화'에서 멀어질거라는 점은 상식수준에서도 예측가능한 결과이다. '더 많은 제작비'는 감독의 상상력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 뿐만아니라 그런 재현의 과정에 관여하는 수많은 기술자와 제작비 회수에 노심초사하는 제작자의 간섭이 더 커질 가능성을 동시에 의미할테니 말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면 천하의 피터 잭슨이라도 맹글러에 좀비의 몸통을 끼워놓고 내장을 뽑아내는 장면같은 것을 그의 영화에 낑궈놓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이전 영화는 피터 잭슨의 영화임에 분명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앞으론 누구나 "반지의 제왕"을 피터 잭슨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겠지만 피터 잭슨은 정말 "반지의 제왕"스런 감독인가? 블록버스터는 그 나름의 목표가 있고 투자이익을 챙겨주기 위해 어디까지나 안전하고 검증된 방법으로 영화를 제작해야 하고, 그러라고 비싼돈 주고 감독을 모셔온 걸테니까 굳이 실망이니 뭐니 들먹일 필요도 없지만, 그 감독이 다름아닌 피터 잭슨이고 보니 이런 바램이 든다. 저런 공룡같은 영화도 한 번 찍어봤으니까 이제 그만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에 찍던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주시길, 저런 영화는 카메룬이나 마이클 만 같은 거한테나 찍으라고 하고... 물론 나같아도 이런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저버리고 뉴질랜드같은 촌구석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이 들리 없겠지만, 여튼 바램을 그렇다. 70여편의 영화제의를 마다하며 "아직은 할리우드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내 뜻대로 모든 걸 컨트롤하는 게 중요한데 그곳에서는 그게 힘들 것 같다."라고 말하는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고지식함 혹은 작가적 고집이 아쉽다. (200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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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 ★★★☆
송일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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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험해진 만큼 영화도 험해진 탓에, 세 명의 여성들이 꽃섬을 찾아나서는 이 로드무비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불안했다.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이 삶의 비극성을 폭로하는 가장 무난한 영화적 장치이며 남자가 구원되기 위한 피치 못할 수순이라고 생각하는 수컷감독들이 득세하는 요즘인지라,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가여운 여자들이 꽃섬을 찾아 가는 저 험한 길 어딘가에 강간범 같은 것이 숨어있 지 말란 법도 없기 때문이다.(매춘을 통해 계급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파란대문) 는 혁명적 발상을 설파하거나 인신매매가 경우에 따라선 여성의 사랑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나쁜남자)고 강변하는 수컷 한 마리를 작가이거나 거장 이라고 평가하는 영화판을 지켜보며 도대체 무슨 상상인들 못하랴?)

하지만 송일곤 감독은 남자가 휘두루는 폭력없이도 여자의 삶이 충분히 고난스럽 고 그런 남자와 물리적 대결없이도 여자의 삶이 위안받는, 이색적인(!) 영화를 보 여주고 있다. 설마 현실 또한 그러하다는 말까지 할 작정일까? 영화는 딱히 환상 이랄 수도 없지만 어딘지 현실감이 부족한 공간 속에 세 명의 여자를 배치하곤 그 곁으로 여러 명의 남자들을 지나가게 한다. (그들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 두 남자들이다.) 그 남자들은 영화내내 단 한번도 성적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으 며 심지어 트랜스젠더로 추정되는 남자(?)까지 등장한다. 옥남의 매춘행위에도 놀라운 평정심을 유지하던 옥남의 남편과 그 트랜스젠더가 1인2역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영화는 이렇게 철저히 남성의 흔적을 영화에서 없앤 채 진행되는 것이 다. 혜나의 사산된 아기의 아버지가 어떤 남자인지는 애시당초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고,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욕을 드러내던 그 노인네는 영화 초장부터 옥남 의 배위에서 복상사하며, 마누라를 상습구타하던 알콜중독자는 거세된 시체로 영 화에 등장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無性化된 영화적 공간에서 그 렇다고 그녀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맘껏 향유하는 것도 아니다. 극중 혜나와 옥남 은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자극할 만한 종류의 고통을 받으며 등장하고 또 영화 내내 그 상처를 치유한다. 하지만 그 치유는 "여성의 연대"(프라이드 그린 토마 토)같은 정치적 자각이나 "모성의 회복 혹은 확대"(내 어머니의 모든 것)라는 생 물학적 자각이 아니라, 최면동안 흘린 뜬금없는 눈물과 유진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된 것이다. 이런 결말을 안이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어디까지나 예술적인 거라 고 해야할지 감이 안 서지만, 그 덕분에 남자들도 자책감이나 性的 괴리감없이 마지막 씬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性이 제거된 영화적 공간에선 母性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자기가 낳은 아이를 변기에다 버린다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어머니가 되기를 포.기.한 혜나는 어 쩐일인지 어머니를 찾아 나서고, (매춘이라는) 가장 어머니스럽지 못한 방법으 로 좋은 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옥남은 그 결과 어머니가 될 자격을 박.탈.당한 다.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닌 두 여자. 영화는 혜나의 친엄마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설정으로 혜나를 母性의 영역에 발디디지 못하게 하지만 그것은 징벌의 의미가 아니다. 혜나가 영아살해의 죄책감을 벗어나는데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 母性 을 갖지 않는 것이라면, 혜나가 친엄마를 만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녀가 치유 되기 위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한편 딸과 떨어져 있게 된 옥남은 딱히 딸이 그립 다는 기색도 아니고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님에 괴로워 하지도 않는 듯 보인다. 대신 그녀는 딸 대신 일행들을 안아주고 머리빗겨 주며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고, 동시에 어머니의 이미지와 양립하기 힘든 천진함과 순수함이라는 그녀의 본성이 더욱 광채를 얻은 것이다. 송일곤의 단편 "소풍"도 어린 자식을 죽여야하는 어머니 의 갈등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와 관련된 부분이 있지만 그의 영화라곤 본 게 둘뿐이어서 母性 혹은 여성성에 대한 감독의 심중을 알기 힘들다. 하지만 그가 예 컨대 페드로 알모도바르와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여성성에 경 도된 이 게이 감독과는 달리, 송일곤은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母性愛나 여성성에 함몰되지 않고 단호한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때문 에 그의 영화는 예컨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라는 걸출한 영화에서 느끼게 되 는 진한 감동과 고양된 감정을 얻기는 힘들지만 외국 어느 평자의 말처럼 '여성 을 다룬 가장 파워풀하고 스트롱한 영화'라는 말은 들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베니스영화제 같은 졸린 소리와 달리 이 영화 의외로 재밌고 동시에 묘한 감동 을 준다. 특히 옥남역을 맡은 서주희씨의 연기가 뛰어난데, 마치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쓰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디지털 카메라가 잡아내 는 순간적인 표정의 변화와 미세한 떨림은 디지털 카메라로 35mm의 영상과는 다 른 미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도그마선언에 전적으로 수긍하게 만든 다. 한편 유진역을 맡은 임유진이란 배우는 상당한 미인인데다 굉장히 엘레강 스하게 생겨서 보는 남정네를 기쁘게 한다. 많은 조연들도 한결같이 뛰어난 연 기를 보여주고 있고 특히 어어부밴드와 볼빨간이 떠돌이 밴드로 출연하기도 했다. (2002.1.22)

 

* 17일

1. 신의 간섭 (엘리아 술레이만, France/Morocco/Germany, 2002, 92min)
http://us.imdb.com/Title?0274428

2. 불확실성의 원리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France/Portugal, 2002, 133min)

* 18일

1. 교사형 (絞死刑) (오시마 나기사, Japan, 1968, 117min)  

2.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등...)

3. 보쿤치-내가 사는 곳 (ぼくんち) (사카모토 준지, 2003년)
http://www.tojapan.co.kr/culture/movie/pds_content.asp?service=worklib&number=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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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스위트 식스틴 (켄 로치)  
http://us.imdb.com/Title?0313670



물론 영화보는 것이 영화제에 가는 가장 큰 이유라면, 자기암시 효과는 두번째 이유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는 내 삶의 기쁨이며... 이교도의 핍박과 고단한 여행길을 마다않으며 성지순례를 떠나는 동기와 비슷하달까. 그의 영화 세 편 보겠다고 포항서 서울까지 찾아간 후에야 비로소 오즈 야스지로의 팬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 사연은 흡사 신앙고백과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졸업이다 뭐다 없는 시간을 쪼개 없는 돈 긁어 모아가며 부산영화제에 찾아간 것도 짤없는 영화광으로 거듭 나기 위한 자기수행의 연장에 다름없다.

그런 맥락에서 부산영화제는 좀 가찮다. 까짓 부산쯤이야. 게다가 사람도 그닥 많지 않고 문화회관같은 소박한 장소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부천영화제에 비하면, 떠밀려다닐 정도로 빠글대는 사람에 메가박스 같은 데서 영화를 틀어대는 부산영화제는, 어딘지 돗대기 시장처럼 번잡하고 정이 안간다.

올해 부산 영화제에서 본 영화 여섯 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역시 켄 로치의 Sweet Sixteen. "이치 더 킬러" 한 편만으로도 올해 부천영화제를 찾은 보람이 있었다면, 이 영화 한편만으로도 부산영화제에 온 이유가 충분히 된다. 스위트 식스틴은 켄 로치의 영화치곤 이례적이다. 이전 영화처럼 자본과 국가의 폭력, 노동계급의 자기개혁 같은 사회적 메시지 대신, 이 영화는 가족애와 우정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빈민계급 출신 10대 소년의 멘탤리티를 해부한다. 이전 영화중에 가족애나 부성애, 혹은 모성애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가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모성애라는 소재를 빌려온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는 자본주의적 상거래의 가장 순수한 구현인 마약밀매라는 소재가 단지 '배경'으로 물러난다. 주인공의 짧은 인생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사건이 마약밀매의 당연한 수순인 체포나 살해가 아니라, 제대로 된 가정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점은, 골수 사회주의 감독의 영화로선 의외의 결론이다. 이건 마치 브라이언 드 팔마 버전의 '스카페이스'를 보는 듯하다. 누이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각종 범죄의 형태로 구현되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식을 압도했던 것처럼.

물론 빈민계급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범죄'뿐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신랄한 분석은 분명 켄 로치적이지만, 마약밀매를 통해 얻은 짧은 성공이 가족애와 우정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는 결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켄 로치적인 분석으론 의외이거나 너무 완곡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예컨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는 다른 위치에 서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바보, 아직 우리는 시작도 안했잖아"같은 대사를 스위트 식스틴의 주인공은 내뱉을 수 있을까? 마약밀매와 상해로 이제 곧 감옥에 가야하는 소년이 무슨 희망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켄 로치가 이전 영화보다 덜 분명한 정지경제학적 분석을 내놓은 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딱 10대 소년이 느낄만한 세상에 대한 절망감과 무기력을 묘사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우린 기껏해야 마약밀매로 거둔 짧은 성공 정도가 이 소년이 기대할 수 있던 유일한 성공의 통로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런 성공의 말로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인 거다, 영국은. 쉽게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 켄 로치는 그래서 예컨대 기타노 다케시와는 다른 정치적 위치에 서있고, 때문에 다소 감상적인 "스위트 식스틴"은 역시 켄 로치적인 영화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 건강한 투쟁의지를 보여주던 켄 로치이고 보면, 이 비참한 성장영화는 오히려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자본주의에 대한 암울한 비젼으로 가득 찬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사카모토 준지의 '보쿤치-내가 사는 곳'도 기억에 남는 영화다.

국내에 소개되는 일본의 상업적 흥행물들의 가장 큰 미덕는 그것이 비록 낯뜨겁게 작위적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믿음, 소외되고 부족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셜 위 댄스", "스페이스 트래블러스", "웰 컴 미스터 맥도날드", "워터 보이즈", "자살관광버스"같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들 모자라고 어설프며 사는 데 서툰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사건(일본영화의 그 기발한 아이디어란! 저렇게 참신한 아이디어가 통통 튀어다니는 한국 영화란 얼마나 드물던가? 소위 컨셉 하나로 영화 하나를 다 떼우는 "집으로", "굳세어라 금순아", "라이터를 켜라"같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산업적 성장 하나만 가지고 한국을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라느니 떠들어대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게 아닐까 싶어진다.)을 통해 성장하고 강해지고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게 된다. 한마디로 건강한 영화다. 일본 문화는 잔인,변태이기 때문에 일본문화 개방은 안된다 어쩐다 헛소리를 해던 게 불과 몇년 전인데, 일본문화 수입된 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얼마나 안잔인하고 안변태적인가? 친구, 나쁜남자,...

여튼 이 영화는 엄마없는 하늘아래 살고 있는 어린 두 형제와 배다른 젊은 누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찢어지게 가난하고 약간씩 비정상적인 섬마을 사람들의 개그쇼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무리 개그를 해도 옆자리 여자처럼 기어이 훌쩍거리게 되는 감동은 하나씩 낑궈져있고, 역시나 뒤집어지게 웃기는 장면도 등장한다. 정말 일본영화가 짱이다, 옛날영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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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
곽경택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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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거의 모든 영화를 재밌게 보며, 한때 싫어했으나 지금은 재밌다 재밌다 하면서 보는 영화-멜로 같은 것-도 많지만,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유독 싫어지는 종류의 영화가 있다. 깡패새끼들 나오는 영화. 착하고 순한 사람들의 소심한 마음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저 가장 질 나쁜 종류의 인간들이 등장하고 시뻘건 피와 함께 내장 후벼파는 소리가 들리는 리얼한 살인씬이 나와야 영화가 보다 흥미진진해지고 볼만해진다고 생각하는 관객과 제작자들의 저 조잡한 선정주의가 환영받는 우리 영화판의 풍경은, 우리 사는 세상이 왜 이처럼 타인에게 비열하고 냉담하며 취향은 천박하고 저속한지에 대한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것 같다. 너와 내가 원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 같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피와 단말마의 비명과 애써 가꿔온 삶이 처절히 무너지는 장면일 뿐인지라 그런 비참함 속에서 가장 상투적인 방식으로 조장되는 싸구려 감상주의에도 그만 감동씩이나 받으며 저 영화 잘만든 영화라며 주워섬기고 다닌다는 식이다. 예컨대 아무 이유없이 남 장사하는 곳에 쳐들어 와서 선량한 사람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는 터무니없이 불쾌한 영화 주유소습격사건 같은 게 재밌고 웃기는 영화라더라.

한국제 깡패영화의 지존이시며 어이없게도 조선땅 최고의 관객동원수를 자랑하시는 이 영화에 대해, 나는, 무지 열받는데 어디 화풀이 할 데 없는 날을 위해 아껴두었다고 열라 씹어대면서 기분을 풀어야지, 류의 계획을 갖고 있었더랬는데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깡패새끼들 설쳐대는 장면들에 '조까튼 넘들'을 연창하면서, 한편으론 중학교 때 화장실 뒤편에 불러다 놓고 나를 집단구타 하던 그 양아치새끼들도 까불까불하다가 저 조까튼 넘들처럼 사시미에 담궈져 어디서 피 질질 흘리며 뒤졌을까 같은 통쾌한 상상도 하면서, 또 노태우개새끼, 깡패들 잡아가두기도 하고 좋은 일도 했구만, 류의 감탄도 하면서 꾸역꾸역 영화를 봤다. 압권인 장면도 몇 있었다. 타인의 복부 사시미로 쑤시기를 즐겨하던 장동건이 지가 뿌린대로 지 배에도 칼이 꽂히는 그 통쾌한 장면에서 무슨 성악가가 불러제끼는 삐리리 음악은, 마치 청산벌에서 눈보라 맞아가며 싸우다 죽어가는 독립군 류의 비장미를 조장하며, 깡패영화가 양아가 되려고 분투중인 중고딩들과 양아 인생에도 감동받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먹물들에게 얼마나 유치한 방식으로 어필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또 불알친구 배에 사시미 찌르도록 사주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위증하는 것이 쪽.팔.려.서. 이실직고를 한다는 저 해괴한 윤리의식과 그에 감동받아 질질 짜는 친구란 넘이란... 참 여러모로 가관인 영화였다.

영화 밖의 이야기도 해괴하긴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최고의 관객동원을 했고 거기에는 수많은 중고삐리들의 머릿수가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다들 아는대로 얼마전엔 이 영화 보고 용기를 얻은 한 왕따가 수업중인 지네 학교 짱을 사시미로 담군 참으로 바람직한 사건도 있었다. 친구, 의리의 이름으로 살인과 협박으로 점철된 범죄자의 일생을 연민과 회한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영화니까 당연히) 그 시선을 수백만의 관객에게 공감하게 만드는, 연고주의에 대한 이 반윤리적 찬가가, 욕지거리와 타인에 대한 험한 짓을 남성다움의 상징으로 착각하는 저 숱한 중고딩들에게 존.나.게 감동스런 영화로 비쳐질거라는 건, 굳이 과외집 애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눈에 보듯 뻔하다. 어떤 얼빠진 새끼가 이 영화보고 헤까닥해서 미친짓거리를 하는 거야 확률적으로나 뭐로나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몇 년전 미국의 (한두번도 아닌) 어떤 총기난사사건의 고딩 주인공이 매트릭스, 내추럴본킬러 등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헐리웃의 제작자들이 먹어야했던 온갖 저주섞인 비난과 법률적 제약 등과 비교해보면, "친구를 40번 보고 용기를 얻어서"라는, 발뺌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이 확실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우리 영화판의 폭력조장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해괴하달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맛간 넘의 일탈행위를 오로지 한 편의 영화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학교 폭력의 본질을 왜곡할 소지도 있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와 그 주위의 장삿군들)가 대답해야할 사회적 윤리적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이 웃기는 시스템에서는 18금이 18금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18금을 핑계삼아 살인 장면을 저토록 리얼하고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감독 및 제작자들과, 18금이 18금이 아니도록 불철주야 힘쓰시는 극장주들과 비디오샵 오너들과, 얄팍한 상업주의라는 게 뻔한 영화에 대해서도 그 영화 소재와 그 묘사방법에 대한 어떤 행정적 제재도 진보에 대한 천인공로할 반동이라는 식의 열변을 토해내는 저 사이비 자유주의자 행세하는 영화판의 말꾼들과, 대견하게도 요즘 잘 나가주고 있는 한국영화에 괜히 초치는 소리할 거 뭐 있느냐며 한국영화 OK만 연발하는 제도권 언론들, 그들 중 어느 누가 이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으며 자성의 기회로 삼고 있는가? 하지만 나에게 정말 무서운 것은 저 뻔뻔한 장사꾼들의 하루이틀도 아닌 부도덕함이 아니라, 그들의 침묵을 면책해주고 이 덜떨어진 영화에 과도한 상업적 성공을 안겨준 우리 사회 일반의 이 침묵의 연대이다. 그 영화가 헐리웃제 영화보다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대중의 가장 퇴행적 정서(우리가 남이가,부터 마초이즘까지)에 감칠맛나게 영합하기만 하면, 그 영화보고 감동먹은 어떤 양아가 어느 구석 방에서 장동건처럼 멋지게 누군가의 뱃때지에 칼빵을 놔야지 류의 계획을 위해 칼을 가는 것 쯤, 상관없다는 식의 무감각과 침묵이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이다. 세상은 점점 더 험하게 변해가는 것이 당연하니까 내 주위에만 칼 든 놈 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편리한 대로 매력적이지만, 순하고 착한 사람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원한다면, 저딴 거지같은 영화에 열광하는 짓 같은 것은 그만두는 것이 도움될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우.정.이다. "남자들이 보아야 할 영화" "여자들은 이해하기 힘들 남자들만의 의리를 감동적으로 묘사한 영화" 같은 개소리와는 달리,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의리와 우정은 의리도 우정도 아니다. 이 영화의 4명처럼 나에게도 중학교 때부터 어울리는 3명의 친구(+1명(女))이 있어 계도 만들고 영세가정에 매달 얼마씩 돈도 주고 그런다(돈없다는 핑계로 나는 계돈 안내고 있지만). 영화와 비슷하게 나를 포함한 두 명은 대학을 졸업했고/다니고 있고, 한명은 조직에 있다. 중학교 중퇴인 이 친구는 조직생활 십수년째인 지금은 잘은 몰라도 같이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가 달려와서 형님 어쩌구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보아선 대충 중간 정도의 어느 위치지 않을까 싶다. 나 휴가 나오면 단란주점에서 양주도 사주고 감옥 들어가기 전엔(난 그가 감옥에 가는 줄도 몰랐지만) 한참 못볼거라고 청주서 포항까지 날 보러 와주고 나한테 덕 볼일 하나도 없음이 분명한데도 한없이 무심한 나와는 달리 가끔 전화도 해주는 이 친구를 난 정말 좋아한다. 좀 숫기가 없고 배려가 부족한 나로서는 몇 안되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그런 친구인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나의 다른 친구들이 그 녀석을 친구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조직원인 아닌 불알친구로서의 그의 모습과 조직원임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때 뿐이다. 우린 모두 그가 조직이라는 걸 알고 있고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2번이나 형을 산 것도 알고 있지만, 같이 있을 때는 아무도 그런 사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이란 건 자신이 의지하는 대로 변할 수 있는 거라는 철없는 생각을 하던 시기가 지나고 나선, 그 친구가 그런 짓을 하고 산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비난의 말도 하지 않는다. 자수를 하기 얼마 전 어디 브라질 같은 데 가서 바나나 농장이나 할까, 신세타령 비슷한 걸 할 땐 그 피곤하고 어두운 인생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 누군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또 내가 알지 못하는 폭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그의 조직원으로서의 모습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중요한 증인이 되어 내 한마디가 재판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위증을 하라고 친절하게 해야할 말까지 챙겨주는 영화 "친구"의 친구(!)들처럼, 일개 범죄자의 신변을 위해서 힘쓰는 일 같은 것은 절대 안할 것이다. 범죄자에겐 의리가 있을 수 없고 나나 그 친구나 그것을 잘 안다. 이게 자칭 건달이라는 부산 깡패새끼들의 사이비 우정과는 달리 자신을 한 번도 건달이라고 칭한 적이 없는 충청도 깡패의 진짜 우정이다. 조까튼 깡패새끼들... (11/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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