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1801-01.jpg

봄날은 간다 ★★★☆
허진호  2001
naver

이 영화, 볼려고 본 게 아니었다. 8월의크리스마스의 감독이고 이영애에 유지태까지 나오니 안보고 싶은 마음이 들리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게 아니었다. 인정사정볼것없다는 몇 번이고 봐줄 수 있지만, 이명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지독한사랑은 테잎을 사놓고도 차마 볼 엄두가 안 나는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영화에서의 장면이나 캐릭터들은 어딘가 나의 부끄럽거나 어설픈 모습 혹은 슬픈 기분이 들게되는 어떤 기억과 무척 닮아있어서, 그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서적으로 너무 강한 자극을 받게 되곤 한다. 대충 주워들은 이 영화의 줄거리로 미루어 보건대 분명 나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할 것임에 분명했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심란하고 슬픈 기분이 될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이런 사정이었기에 간발의 차로 아멜리에의 상영시간을 놓치지만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 영화 보기를 계속 미루다가 비가 오든지 어쩌든지 하는 구질구질한 날, 비디오로 빌려다 보며 또 어느 방구석에선가 질질 짠다든지 청승맞은 짓을 할 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국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예컨대 가장 비열하게 헤어진 경력이 있는 남자조차도 (예전 그녀에 대한 미안이나 후회의 상념없이) 옆에 앉아있는 새로운 그녀의 귀에 '나쁜 이영애' 같은 소리를 속삭여도 무방할 만큼, 이 영화의 결별은 분명 유지태의 잘못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영애가 나쁜 여자냐 아니냐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마지막 씬, 갈대밭에서 귀를 막고 헤~ 웃는 유지태를 보며 관객들이 속으로 내뱉게 되는 말은 '저런 병신' 보다는 '불쌍도 하여라'에 가까울 것이다. 이들 둘의 헤어짐에 상심한 어느 관객이 도대체 누구땜에 얘네들이 헤어졌을까, 정황을 하나하나 따지고 든다면, 이내 유지태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도록 정성들여 배치되고 조직된 내러티브를 발견하게되지 않을까? 요컨대 이영애는 첫관계를 제안함과 동시에 주체를 못하고 달려드는 서툰 청춘을 누나가 달래듯이 능숙하게 제지(물론 다음다음 컷에서 둘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지만... 급하기도 하셔라... )한다는 식으로 이 둘의 사이가 진전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혼녀에 연장자, 어딘지 숫기가 없는 순수남이라는 대조적인 설정도 마치 완벽한 알리바이처럼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 심지어 헤어지는 마당에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로 그들 둘간의 사랑이 끝난 것은 대체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사랑이 변한 이영애 책임이라는 선고를 내린다.

하긴 이렇게 유지태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설정이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의 설정, 즉 사랑에 목을 맨 순수녀와 사랑에 지쳐 헤어질 시기를 가늠하는 닳은 남자같은 설정을 정색을 하고 풀어놓자면 깡패물이나 신파물 같은, 될대로 되라 류의 영화에서가 아니라면 곤란할 테니까. 게다가 사랑에 빠진 여자를 남자감독더러 창조해보라고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지없이 17,8세기적 여성관을 구원이니 어쩌니 뻘소리와 함께 내놓기 일쑤다. 남편의 성적 망상에 온몸 던져 봉사케 하는 가장 뻔뻔스런 케이스(라스 폰 트리에)부터 강간과 함께 찾아온 첫사랑(브레송의 무세트)같은 개소리를 거쳐 돈 몇 푼에 위장결혼한 양아치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가 급기야 그 양아치에게 구원의 영감을 주기 위해 (감독, 혹은 작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곱디고운 처녀(파이란)의 순애보 같은 것을 일별해 보면, 저따위로 한심하게 죽이느니 차라리 비정한 여인네로 만드는 쪽이 감독으로선 비평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실 누가 나쁜 놈/년이니 어쩌니 시비를 거는 건 이 영화에 관한 한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여자한테 채였다 류의 한맺힌 사연 같은 것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영애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영화 자체는 이영애를 비난하자는 수작은 아니었다. 사실 이영애를 비난하려고 작정을 하고 덤벼들어도 이 영화가 제공하는 단서만으로는 혐의를 잡기가 몹시 힘들다. 아마도 이영애는 그들의 사랑에 싫증이 났던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게 짐작인지 어쩐지 확신하기에는 영화속의 정보가 부족하거나 애매모호하고, 또 모종의 심증을 가지고 사건의 추이를 죽~ 쫓아가다보면 여지없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지는 감정선에 맞닥뜨리게 된다. 예컨대 라면삶으랬다고 화가 난 유지태가 이영애가 홧김에 싸놓은 짐을 가지고 집에 가버리고 좀있다가 유지태와 이영애는 서로 화해를 하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우리 고만 만나자, 같은 소리를 한다는 식이다. 단속적으로 끊어지는 애매모호한 감정상의 흐름은 이 영화가 마치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흐리멍텅한 종류의 인간인) 유지태 한 사람만의 기억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8월의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결국 이 영화는 남자가 기억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냇가에서 사랑의 기쁨을 부르는 이영애를 유지태가 쳐다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영화의 시점은 때때로 유지태의 그것을 차용하지만 결코 이영애의 시점인 적은 없으며, 보다 비중있게 (그래봐야 평면적이지만) 다뤄지는 유지태의 감정상의 변화와 그의 실연극복기를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를 반쪽짜리 연애담으로 만들고 있다. 요컨대 유지태가 이영애의 "사랑이 변"한 이유를 모르듯이 영화를 보고 난 나도 유지태말만 듣고서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이영애의 감정상의 변화는 암흑상자 속의 수수께끼처럼 감춰져있는데 영화는 그것을 해석할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고 단지 괴로워하고 슬퍼할 따름인 유지태의 입장만 묘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정체모를 연애담이 실망스러운 건 그 애매함으로 인해 멜로가 제공해야할 어떤 재미가 반감되었을뿐더러(원래 내 연애담은 사무치지만 딴 사람 연애담은 에로버젼이 아니라면 지루할 따름이고 더군다나 상대방이 술이 취해서 횡성수설 물음표만 남기는 연애담이라면 더더욱 지루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멜로 이외의 무엇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8월의크리스마스를 죽음에 관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고 때문에 영화 마지막에 심은하를 향한 한석규의 독백을 막장에 재뿌린 상업적 타협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 정말로 가슴 아픈 건 심은하랑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설정이 아니라 비디오도 작동시키지 못하시는 아버지를 놔두고 가야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에서도 또 한 명이 죽어나가지만 한 편의 길고 긴 실연기였던 할머니의 인생이 애매모호한 연애담을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주는 영감이란 고작 상사병도 유전인가보다, 정도였다. 게다가 아버지(박인환!)의 홀아비로서의 일상은 서글픈 감정이라도 느끼게 하는가? 고모역에 신신애라니! 허진호의 놀라운 캐스팅감각에 감탄을 금치못했다.

마지막으로 소리를 채집하는 장면들, 이쁘긴 하지만 분명 쇄말주의이다. 메가박스에서 조조시간대에 보았지만 소리 자체가 뭔가 대단한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소리 자체가 작은 데다가 입체감이 부족해서 밋밋했다. (9/29/2001)

C1565-00.jpg

Bridget Jones's Diary 브리짓 존스의 일기 ★★★☆
Sharon Maguire  2001  
imdb    naver
[ 딴지일보 온라인 검열우원에 지원하기 위한 revised version입니다.]

이 영화에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 준 가장 큰 장점은 브리짓 존스(Renee Zellweger 분)라는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고 연봉 수 억대의 커리어 우먼도 아니다. 뱃살은 두꺼워지고 남자친구도 없이 새해를 맞아야 하는, 알콜 중독이 임박한 노처녀다. 영화는 ‘진실한 사랑’을 얻기 위한 그녀의 볼쌍사납고 어이없는 실수담을 연달아 보여주며, 신화적 미모의 선남선녀들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그리는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재미와 유쾌함을 이끌어낸다. 르네 젤위거는 그녀의 이전 어느 영화에서보다 매력적이다. 두둑한 살집이 붙은 엉덩이를 카메라에 들이대며 자빠지고, 구질구질한 방구석에서 술에 취해 '30대 노래'에 맞추어 립싱크를 하며 청승을 떠는 등, 온갖 스타일 구기는 연기를 하면서도!  꼴불견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가엽기도 하고 ‘진실한 사랑’을 향한 그녀의 처절함(마크(Colin Firth 분)를 쫓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웃기다기보다 비참했다.)이 어딘지 공감이 가기도 해서 브리짓 존스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거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진부한 결말에 이르긴 하지만 매우 재미있고 유쾌한 코미디임에 틀림없다.




원작 소설의 광범위한 여성팬층을 생각해 볼 때, 이 영화에 대한 여성관객들의 호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현실감있는 캐릭터의 좌충우돌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었다며 이 영화에 대한 만족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신데렐라 이야기에 기원한 헐리웃제 로맨틱 코미디와는 격이 다른 깊이를 갖고 있는 영화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결국 이 영화 역시 무기력하고 정서발육부진인 여성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헛소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진실한 사랑은 브리짓처럼 살이 쪘든지 실수투성이든지 골초든지에 상관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란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런 정의에 감동하는 것은 키스에 잠이 깨어 백마탄 왕자의 신부가 되었다는 어느 억세게 운좋은 여자의 결혼성공담에 감동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두 가지 재수좋은 경우는 전적으로 남자에 의해 주어지는 호의나 관대함 때문이지, 체중관리나 능력없음 등에 관한 콤플렉스 극복이라는, 그녀 자신의 자기긍정의 결과가 아니다. 브리짓과 그녀의 어머니야 운이 좋아서 그런 남자를 만났지만, 그런 남자를 만나 ‘진실한 사랑’을 이루게 될 것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눈에 띄는 개구리마다 키쓰를 하며 팔자 고쳐줄 변신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처사같다. 어떤 눈병난 남자가 있어 자기조차 자신이 싫은 그런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설상가상 이 영화는 ‘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 남자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 ‘사랑에 눈멀어 맹목적일 것’ 말고도 더 있다고 말한다. 다니엘(Hugh Grant 분)은 그 미덕을 갖추지 못해 브리짓에게 차였다. 전력이 수상하긴 하지만 다니엘도 마크만큼이나 브리짓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브리짓은 다니엘 대신 마크를 선택한다. 이런 설정은 브리짓을 속이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은 다니엘의 바람기에 대한 단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남자의 바람기를 참지못하는 브리짓의 강박증은 마크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그녀는 ‘질투심에 주먹다짐'(여성을 감동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로맨스의 클리쉐)까지 했던 마크를 처음엔 차버렸지만, 나중에 마크의 이혼에 관한 누명-마크가 다니엘의 신부와 불륜을 저질렀다는-이 벗겨진 후에는 그를 사랑하기로 맘먹는다. 이 영화의 결말대로라면 브리짓이 (혹은 이 영화에 공감하는 여성관객들이) 생각하는 진실한 사랑이란, 콤플렉스 덩어리의 한심한 여성을 조건없이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방종하지 않을 것, 적어도 그녀랑 사귀는 동안에는 어디서 오입질하지 말 것(거 참 힘들군.)도 전제로 한다. 그런 조건은 도덕적으로 타당한 요구일지도 모르지만, 양손에 두 한심남(그 중 한명과는 잠자리도 같이 하면서)을 올려놓고 저울질을 하는 주제에 참 바라는 것도 많으시다 싶다.




이러저러한 사소한 시빗거리 이외에도 이 영화의 대리만족이 차라리 기만에 가깝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사실 내러티브 바깥에 있다. 요컨대 당신이 이 영화에서 느끼는 현실감은 착각일 뿐이다. 르네 젤위거라는 배우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매력이 이 영화의 비현실적인 설정에 개연성(저렇게 망가져도 이쁜 여자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을 부여하는 것일 뿐, 극장 밖 당신 인생은 다르다. 현실속의 보통 여성이 브리짓과 비슷한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서도 인권 변호사와 잘나가는 편집장같은 두 개의 호박을 한꺼번에 만져볼 가능성은 분명 매우 희박하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툭하면 술에 취해 질질 짜기나 하는 의지박약에, 자신에 대해 맘에 드는 점이 별로 없는 자신감 부재에, 심지어 남자 한 번 꼬셔보겠다고 빤쓰인지 치마인지 구별도 안되는 걸 입고 다니는 이 얼빠진 여자한테 ‘진실한 사랑’의 가능성이 한꺼번에 두 개나 생긴다는 것은, 글쎄... 나 같은 평범한 남성에게는 매우 해괴한 케이스로 생각된다.




하기사 신데렐라가 정상적인 정신상태의 여성에게 콧방귀 이상을 유발하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의 억지와 기만도 결코 혐오스럽다거나 위험한 수위의 것은 아니다. 에로영화를 보는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가 잘빠진 여배우와 적절한 내러티브에 의해 강화되는 것처럼,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여자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도 현실감있는 개연성에 의해 강화되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이 영화 매우 재미있다. 특히 르네 젤위거 팬은 꼭 보시라. 이 배우는 뭘 해도 이쁘시다. (2000/9/30)

images.jpg

Malèna 말레나 ★★★
Giuseppe Tornatore  2000
imdb    naver

애시당초 모니카 벨루치가 아니었다면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감정과잉 따위는 전혀 볼 생각이 안드는 종류의 것이다... 어린 숫컷의 성적 환타지라는 쓰잘데기 없는 소재를 뭔가 절망적인 전쟁상황과 연관지어 낭만, 애틋함 따위의 것들로 치장하려 혈안이다... 안봐도 모리꼬네인게 뻔한 감상적인 스코어는 비슷한 류의 통속극 씨네마 천국 풍의 분위기를 계속 조장하며 너저분하기만 할 뿐인 남정네들의 욕망에 뭔가 감상적인 면죄부를 씌어준다... 성장영화 같은 건 언제나 재수없을 따름이다, 특히 이런 식의 변명조의 영화는...

말레나의 인생유전은 어쩐지 위안부 할머니들을 연상시킨다. 물론 말레나는 자발적으로 창녀가 된 것이고 할머니들은 안 그런거지만, 한편 그녀들의 고난은 전쟁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할머니들은 망가진 당신들의 육신이 부끄러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 땅을 헤매시거나 혹 어렵사리 고향땅에 돌아갔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못했을 것이다. 왜놈에게 몸을 더럽혔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뭘 잘못했다고? 그렇다면 말레나 쪽은 어떠한가? 그녀는 남편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전시의 빈곤을 벗어날 길이 막막하여 창녀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숫컷들이 가만 안놔두는 거다. 어쩌겠는가? 먹을 건 없고 난 너무 이쁘다! 때문에 무솔리니가 골로 가고 미군이 주둔하고 동네 아줌마 할머니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말레나를 죽도록 패는 장면에선 또 한번 굉장히 억울해진다. 아, 이쁜 것도 죄냐? 여성끼리의 연대 같은 것도 모르냐? 그날치의 가사노동(과 그 대가로 얻어쓰는 남편의 수입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의 후광)이 준비되어 있는 가정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 있다고, 혼자 사는 여자를 패대기 쳐도 되는 것이냐? 원인제공자는 남정네들인데 왜 그네들의 손찌검은 남편을 향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이딴 소리 해봐야 쓸데없는게 저 아줌마들은 5,60년전 사람들이고 그 당시에는 그 나름의 상식과 처벌방식이 있는 거라는 점이다. 리영희교수가 여자대하는 방식이 봉건적이라 해서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에 찬 인생을, 그깟거,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망가진 인생이 강제징용 끌려가서 어디 다치고, 어쩌구 한 할아버지들의 인생보다 더 슬플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에서 전쟁이나 식민치하의 치욕을 장식하는 가장 무난한 클리쉐는, 많은 경우 왜놈의 혹은 양놈의 배 아래 깔려 엑스터시와는 전혀 거리가 먼 거부의 몸부림을 펼쳐보이는 젊고 순수한 여자들의 모습이다.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아픔이 여성의 질 안에 쏘아지는, 우리완 혈통이 다른 양놈이나 왜놈의 정액,이라는 식의 악몽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호주제 철폐, 군가산점... 오늘날의 많은 쟁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보수적인 남정네들도, 위안부에 관한 부분이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점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가 일본 무슨 관리에게 삿대질하며 분노하시는 사진을 보면 한결같이 피끓는 분노를 느낀다, 저런 씹어먹을 놈들! 위안부의 경력은 할머니들의 수치인 동시에 그녀들을 지키지 못한 남정네들의 수치인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은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고, 또 식민상황이었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두 고난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비극이지만, 그 비극성은 단순히 두 조건의 합이 아니라 두 조건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듯 받아들여진다. 요컨대 한국 처녀의 순결을 쪽바리들이 유린한 것이다!

할머니들의 인생이 종전 후에도 여전히 고난이었던 건 말할 것도 없이 45년 즈음 이 땅의 정조관념이 그녀들의 특수상황을 예외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45년 즈음의 사람들이 (자의든 불가항력이든 상관없이) 그녀들의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위안부할머니들을 비난했듯이,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녀들의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더욱 분노한다. 위안부로서가 아니라 강제징용 당한 후 그 노임을 받지 못한 억울함이라면 우리들의 분노도 지금과 같이 범국민적 차원일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극은 그분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짓밟혔기 때문이지 왜.놈.들.의 배 밑에 깔렸기 때문에 더욱 치욕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강간당하는 여자에겐 그 강간의 상황이 일제치하의 왜놈에 의한 것이든, 평화상황의 이웃집 면식범에 의한 것이든 비참의 강도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일텐데, 우린 쪽빠리들이 우리의 처녀들을 강간했다는 상황에서 행위의 주체(우리완 피가 다른 외국놈!)와 행위의 종류(식모살이 같은 것도 아니고 강간을!) 때문에 더욱 분노하는 것 같다. 민족적 존엄 같은 무지막지한 울림의 관념도 순결 어쩌구의 해괴한 자장을 벗어날 수 없고, 그렇게 수상하게 비틀어진 채 오늘날의 우리에게 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위안부의 사항을 페미니스트들의 제1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식의 말까지 듣고 나면, 45년 말레나를 패대기 치던 남정네 혹은 여편네들과 오늘날의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인지 의아스러워진다. (2001/04/30 )

 

B9390-00.jpg

Sex: The Annabel Chong Story 애나벨 청 스토리 ★★★
Gough Lewis  1999  

영화 앞부분에서, "251명의 남자와 10시간 동안 섹스를 하는 것과 한 남자와 10시간 동안 섹스를 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라며 그 억지미소를 지으며 꺅꺅 거리는 애나벨 청의 그 자신만만함은 차라리 멋지기까지 했다. 이건 정말이지 도발적인 문제제기이다. 종교적인 이유에서건 무슨 이유에서건 이 여자를 인간 아닌 인간으로 취급할 수 있을만큼 가치관 같은게 확실한 사람을 제외하고, 특히 자칭 페미니스트거나 성적으로 진보적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대답해보자. 당신은 그녀의 말을 긍정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의 딸이, 부인이, 하다못해 기냥저냥 아는 여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그런 식의 행동을 한다면( 251명이 많다면 뭐 25명쯤으로 하자.) 그걸 감당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사실 영화를 보기전에 그녀에 대한 나의 입장은, 멋진여자군! 이었다. 성욕은, 그것이 남자의 것이든 여자의 것이든 전혀 챙피할게 없는 본능이고,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금기들과 감시의 눈초리들은 뭔가 사회질서와 미풍약속 어쩌구 하는 미명 아래, 개개인의 상상력을 억압할 뿐인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따라서 뭔가 보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획득하기 위한 대결의 장에서 성에 관한 담론들이 그다지도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자율성 같은것들이 그만큼 억압당하고 있기때문이라는 방증이 되는거라고 생각했었다. 라이히가 오버는 했지만 프로이트의 문화이론보다는 오히려 진리치에 가까운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녀자신이 초반부의 그 당당함(물론 끊임멊이 오버하는게 어딘지 불안해보이긴 했지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포르노스타로서의 삶을 dignity를 잃어버린 것으로 파악하면서 눈물의 후회(?)를 하고야 만다. 맛간 녀의 생지랄 같은 걸로 파악하고 싶으신 분들도, USC 라는 뭔가 굉장해보이는 그녀의 학력과 페미니즘 어쩌구 하는 그녀주위 사람들의 평가를 듣는다면 미친년 쯤의 서슴없는 판단을 내리기도 머뭇거려지지 않을까 싶다.( 한 인간의 학력이 그인간의 행위의 진지성,성실성 같은걸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이런 역겨운 오만은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시사회에서 그녀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에게 내가 맨 처음 물은 말이 "그여자 똑똑한거 같긴하디?"였다는 것은 두고두고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하다못해 251명의 "이기적인" 남자들을 배위에 올려놓고 짓는 그 표정조차 엑스터시의 그것인지 통증의 그것인지 애매모호하다. 혼란해진 머릿속을 편한대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그녀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는 그녀가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에 기인한것은 아닐까? 한남자가 10시간동안 251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는, 물론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이벤트가 끝난후, 그 남자도 자신이 dignity를 잃었다고 눈물을 흘릴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녀의 후회보단 덜하지 않을까 싶은게, 몇명이랑 잤느니 몇시간동안 했느니 어쩌느니 하는걸 자랑이라고 떠들어대는 종마들이 저 내무반 같은데(뿐이겠냐마는...) 득시글하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성욕과 그 추구의 영토에서의 남자들의 독점은, 여자가 시도하는 성욕에 대한 어떠한 정공법적 이의제기와 도전도, 결국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기위한 색다른 시도같은 걸로 파악하는 아둔함과 오만함이라는 징후로 나타나기 때문에, 애시당초 실패가 노정된 길이라 생각된다.( 뭐 경우가 다르겠지만 예컨대 무슨 페미니스트들의 무슨 이유에선가 누드시위에 대한 해외토픽같은 것들이 정녕 목적하는 바가 그 시위의 이유와 동일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거기다 이번엔 300명! 어쩌구 하며 애나벨 청의 선구적(?)인 시도와 혹 모를 도전적(?) 정신을 제깍 돈벌이화 하고야마는, 그 강렬한 식욕의 자본주의 어쩌구 같은거 까지 생각해보면, 그런 불가능한 여건에서 저런 황당한 짓을 하는걸 보면 저여자 기냥 막사는 여자일뿐이지 않을까, 그런 결론을 내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쨌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인대로 충격적인 영화다. 뭔가 다큐같은것엔 낯선 눈으로써도 몇몇 장면은 이게 아닌데... 싶은 기분도 들고(예컨대 그녀의 집 화장실 수건에 perfect home이란건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거...), 자막도 엉망이지만, 야하다기보단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녀의 갱뱅 자체보다 그 의도를 더욱 이해하기 편한 것은 확실하다.


...........................................................................


애나벨 청은 그 섹스 이벤트 전후해서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적을 두고 지 하고 싶은 공부하며 잘 지낸다. 그녀의 직업에대한 편견이나 그에 따른 불이익도 없어보인다. (내가보기엔) 단순한 의문제기일 뿐인데 그에 대해 무슨 위원회같은걸 소집해서 뭔가 징계를 내리는 식의 (내가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헤프닝과는, 물론 전혀 다른 성질의 일일 것이다. 이건 기본적으로 대.학.이란 곳이 뭐하는 곳이고 무엇까지 할 수 있는 곳인가에 대한 인식과 동의의 차이일텐데, 어쨌거나 남조선의 이 자랑찬 연구중심대학에선 (내가보기엔) 저런 초등학교틱한 징계와 훈육과 학생관과 무엇보다 감시체계가 그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런 체계라면 적어도(제적때문에라도) 에나벨 청같은 맛간녀는 절대 안나올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에서 완벽한 학업풍토라 할만하다는 생각이다.

ps. 이런 시덥잖은 글을 쓰고도 뭔가 후환이 두려운것은 어디까지나 피해망상일 뿐이라고 자기암시가 필요한 곳인가, 이곳은... 그런 생각이 드는군... --  (2000/06/13)

 

ga.jpg

Gladiator 글래디에이터 ★★☆
Ridley Scott    2000  
imdb

영웅적인 군인이 주인공인 동시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세상에는 사람이 열라 많이 살고 있고, 역사란 것도 꽤 오래되었으니까 그 수많은 군인 중에는 분명 진보와 인권같은 것에 동참한 군인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건 그 사람이 제.대.로. 군인이기를 포기했을 때의 경우이다. 소위, 군인의 길,이라 이름붙여지는 비장미 넘치는 자아도취는 국가주의의 코드없인 이해될 수도 없고 동시에 폭력과 살인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민중의 정치의식이 저조할때는 툭하면 쿠데타 같은 소릴하며 아무대나 총질해대기 일쑤고, 자가증식을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고 위험을 과장하고 국가를 위해, 어쩌구하는 명분아래 가진자를 위해 민중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게 그들이다. 코스타 가브리스가 영화 'Z'에서 한 파쇼의 입을 빌어 "우리의 권력은 군대와 공장과 학교에서 나온다"라고 말했을때, 적어도 조선땅에 발딧고 살면서 정상적인 현대사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런것 같다,고 동의하지 않을까?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해, "야만족"의 나라에 침략해 찌르고 쑤시고 자르고 피를 흩뿌릴때, 지들 제국의 신민이 아닌 게르마니아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었던 거다. 도대체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적에 대해 무기를 든 사람들을 그따위 야만족으로 묘사하면서, 열라 거들먹거리며 지 부하에게 "목숨을 바치"길 선동하는 그따위 살인마는 열라 멋지게 그리는 건 무슨 정신이냐? 지 마누라와 애새끼 죽는게 그다지 비극이라면 지 손으로 죽인 수백명의 아버지와 아들들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에드 해리슨가가 "더 락"에서 지들 부하 몇명 죽은거 갖고 열불터져하며 그 이상한 화학무기를 탈취하는 건 뭔가 감정적으로 이해가 가는 부분이라는 식의 묘사는, 아무리 생각없는 미제 감독이라지만 존나 역겹다 하지않을수 없다. 도대체 지들이 쳐들어간 남미의 어느 못사는 나라나 중동의 무슨 나라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군대는 필요악도 아니다.

리들리 스코트.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형편없어져가는 감독중 하나다. 베르톨루치의 경우는 실망,정도이지만, 이 인간의 경우는 역겨움이다. 지아이제인 같은 쓰레기를 만들때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 도대체 뭘 기대했던가, 나는... 이라고 쓰긴 하지만, 역시나 뭔가 스타일이 죽이는 화면발은 정신을 쏙 빼놓는다. 게르마니아의 어느 평원에서 벌어지는 전투 씬은, 라이언 일병 류의 열라 잔인한 비쥬얼은 아니지만 뭔가 머리털을 쭈뼛쭈뼛 서게하는 파워풀함의 연속이고, 사람 모가지가 날라가는 학살을 통한 제국확장의 현장이지만 어쨌거나 다시한번 보고 싶어지는, 끝장인 장면이다. 검투사가 무슨 전차랑 싸우는 장면도 러셀 크로가 나서서 지랄하는 바람에 열라 비위상하긴 하지만 멋졌다. 끝이 좀 미적지근하고 정말 저런 일이 그때 있었던 걸까, 검투사랑...가 칼싸움한다는게, 심히 의심스럽고... 에일리언1편의 감독이 브레이브하트의 감독 수준으로 퇴화하는 걸 5천원주고 지켜봐야
하는 열라 열받는 영화다.

러셀크로. 열라 터프한척하며 뭔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눈빛을 하고 있는데 면상에다 토사물을 쏟아내고 싶은 기분이다. 나가 죽어라 둘다. (2000/06/06)



--------------------------------------------------------------------------------


[아래 글은 sheeth라는 사람의 댓글입니다.]

보드 (Board) hobby/TheaterWorld
글쓴이 (From) sheeth (twins)
날짜/시간 (Date) 2000년06월06일(화) 14시09분24초
제 목 (Title) [RE:Cocteau] 글래디에이터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은 헐리우드도 아니고 리들리 스콧도 아닙니다. 로마 역사서는 꾸준히 로마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부족을 야만족이라 묘사하였고 당시로서 현재의 독일인 게르만 거주 지역은 울창한 숲만이 끝없이 펼쳐진 지역으로 로마가 오랫동안 왕정과 공화정을 거쳐 제정에 이르는 동안에도 게르만인들은 통일된 힘이 없이 부족단위 구성을 유지할 정도로 낙후해 있었던게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은 갈리아전쟁 이전의 이베리아 지역이나 영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로마에 대항한 괴씸 죄가 더해져 로마역사서는 야만인으로 그들을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로마는 특히 게르만인들에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이미 클라우디우스 황제 이후에 게르만에 대한 정복을 완전히 포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갈리아지방을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게르만과의 전쟁은 설령 게르마니아 지역까지 넘어가 벌이는 전쟁이라 하여도 전쟁 이후에 다시 복귀시키는, 즉 정복전쟁이 아니라 당시 로마 국경을 지키기위한 방위전쟁의 성격을 띄었습니다.  



--------------------------------------------------------------------------------


보드 (Board) hobby/TheaterWorld
글쓴이 (From) Cocteau (Power to Imagination)
날짜/시간 (Date) 2000년06월07일(수) 10시34분5초
제 목 (Title) [RE:sheeth] 글래디에이터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 에서 로마풍속의 퇴폐성에 비해 게르만족의 소박함을 예찬하였고, 혈통이나 조상의 공적이 한 젊은이가 지도자가 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적고 평화시에는 민회를 열어 그곳에서의 결의가 왕 이상의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는 등, 이들 "야만족"에게서 의회의 옛 전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선구적인 인정 등을을 찾아볼 수 있다(새 유럽의 역사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는 평가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료의 방대성이나 역사서 편찬자의 편견 같은 것에 의해 역사적 진실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Carr의 지적 같은 것은 제쳐두고라도, 어떤 족속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문화상대주의니 어쩌니 하는게 인류학 같은것의 문외한에게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에, 넌센스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게르만족이 야만족이었던 것은 "로마문화권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이 헐리우드도 아니고 리들리스콧도 아니라구요? 아우렐리우스가 콤모두스가 14,5세가 될때부터 황제의 권한 행사에 전면적으로 참여시켰고, 아우렐리우스는 공화정은 고사하고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공화국안에서 구하지 않고 자기아들을 선택했고, 결정적으로 아우렐리우스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뻥을 쳐대며 콤모두스를 인간말종으로 묘사하는 것과, 게르만족을 무슨 원시시대의 맘모스사냥꾼처럼 묘사하는 것은 동일한 목적에 봉사합니다. 물론, 콤모두스의 누이인 루실라가 열라 방탕녀이고 그녀가 제국 제3위의 지위에 만족못하고 황후에 대해서도 질투심을 느껴 황제를 죽이고자 암살자를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에의 열정으로 자신과 아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가련한 어머니로 묘사되는 것의 목적도 동일하고요. 또한 막대한 재산가였고 집정관을 맡아 그리스 민정에 참여했던 막시무스를 소박한 농부에 오로지 군인의 길에만 힘쓰고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사기치는 것의 목적도 역시 동일합니다. 검투사는 고사하고 콤모두스에게 죽임을 당한 막시무스 가 세쿠토르(검투사)로 735회나 싸워 이긴(물론 황제였기때문이겠지만) 콤모두스를 부상의 와중에도 싸워 이겼다는 뻥에 이르면, 헐리웃의 장인인 리들리스콧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헛지랄을 1억달러를 써가며 하는지 뻔해지는 겁니다. 지루하고 구질구질한 일상의 무게에 빠져있는 고개숙인 남자들 자신들과 그들에게 밥맛없어 하며, 혹은 미소년들의 중성적 매력에 싫증나 하며, 마초하고 정의로우며 가정에 충실하고 어쩌구 하는 남성성의 환상을 꿈꾸는 여자들에게, 딱! 중학교 1,2학년 애들이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완벽한 남성상을 2시간여 동안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뻔한거 아닙니까? 그를 위해서 막시무스의 그 강렬한 원초적 전투력과 죽음에 초연하게 맞서는 성자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빨도 안닦은 게르만 족들이 꽥꽥 거리며 짐승소리를 내는 것이고, 그의 도덕적 정당성과 현대성을 고려해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가진 놈임을 알리기 위해, 또 그의 분노와 좌절과 시련이 보다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콤모두스는 인간말종이 되고 아우렐리우스는 공화정의 희망으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묘사되며, 가정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어떤 놈으로 묘사하기 위해, 탕녀 루실라는 정숙한 어머니로 변신하여 키스 한방의 애틋한 로맨스를 연출하고... 씨네21에서 한말처럼 이렇게 100% 전형으로 이루어진 노골적인 영화는 없었고, 이런 뻔뻔함이 오히려 의혹의 눈빛으로 이 영화를 씹어대는 사람조차 헛지랄 말고 그냥 입닦치고 보자, 누가 그런거 모르랴, 싶은 기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게르만족에 대한 평가중 "야만족"이라는 평가에만 촛점을 맞춰 초반 20여분 동안 활극을 제공하는 것은 의도적인 선택 외에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 지점에서 저의 속을 뒤집는 건, 그렇게 뻔뻔한 수작을하면서도 묘사된 주인공이 짓거리가 열라 재수없기 때문입니다. 지 칼날에 죽은 수백명의 목숨에 대해선 "제국의 영광을 위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지껄이면서 기껏 지 마누라랑 아들 죽은걸 갖고 그지랄로 눈물 콧물(얼마나 점성이 높던가 마초의 콧물은...)흘리며 오버하고 지랄인지, 또 원하지 않으면 관둬도 좋다면서 은근히 자신의 탈출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엘리트의식,... 한마디로 리들리 스콧의 의도가 아니라는 의견은, 이왕의 그 막가는 이미지를 더욱 견고히 하고 동시에 조회수도 높이기 위해 아무 근거없이 한 여자의 성관계를 아무렇게나 보드에 올리는 허접쓰레기 글에 대해 "천박함 속의 날카로움과 분석력"이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특이한 생각같습니다.




--------------------------------------------------------------------------------


보드 (Board) hobby/TheaterWorld
글쓴이 (From) sheeth (twins)
날짜/시간 (Date) 2000년06월07일(수) 14시28분15초
제 목 (Title) [RE:Cocteau] 글래디에이터

열심히 공부좀 한 것 같군요 ^^


로마풍속의 퇴폐성(로마가 퇴폐적이라는데 모든 역사학자가 동의하진 않습니다만) 에 비해 게르마니아가 가진 소박함이 낙후성에 대한 반증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로마의 지난날의 순수함과 영광을 그리워하던 타키투스였긴 했지만 게르만족의 소박함을 '예찬'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혈통에 관한 내용이나 의사 결정에 관한 내용은 게르마니아가 로마에 비해 우수하다거나 대등하다, 혹은 열등하지는 않다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카를 구지 인용하지 않으셔도 역사가 외곡될 수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 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제1차 자료인 역사서만이 그나마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은 매우 듣기 거북하고 때론 기분 나쁜 말입니다만 어떤 문화도 결코 더 우월 하거나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어색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문화와 아마존 밀림의 한 부족의 문화에 비교하여 각자의 길이 있었을 뿐 더 우수하거나 열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무리입니다. 온전히 로마역사서에 의지하여 당시 게르만인이 야만인이었다고 믿어 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엄연히 존재하였던 차이를 무시하고 "로마문화권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일 뿐" 이라고 나름대로 당당히 결론 내리는 용기는 말그대로 용기일 뿐입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오류는 이미 제가 다른 보드에서 지적 하였던 것입니다만 아마 읽어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말씀 하신대로 역사서의 내용에 의하면 진실은 글레디에이터의 이야기와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헐리우드와 리들리 스콧에게 부당한 죄를 씌우지 말자고 한 것은 게르만 족을 야만족 처럼 묘사( 이 영화가 게르만 인을 야만족으로 묘사했다고 하는 근거라고 하는 것은 오직 멋진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과 영어가 아닌 그들만의 언어로 소리 쳤다는 것뿐입니다만) 한것에 대한 내용이지요. 영화 내용에 관한 것은 창작자유의 영역이라 여겨집니다. 그들의 의도가 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또한 맘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한 말에 근거하여 얘기 해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저는 잊고 있던, 글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다른 일을들추어내며 구지 감정의 앙금을 감추려 하지 않으신 것은 유감스런 일입니다.





--------------------------------------------------------------------------------


보드 (Board) hobby/TheaterWorld
글쓴이 (From) Cocteau (Power to Imagination)
날짜/시간 (Date) 2000년06월07일(수) 23시33분18초
제 목 (Title) [RE:sheeth] 글래디에이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딴 노가리야 로마사 같은 것에 문외한인 저로서도 1시간이면 할 수 있는 수준이지요. 책찾는데 20분, 읽는데 40분.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앞서의 그 책 정도면 충분하죠. ^^

이런 류의 얍삽함으로 옮겨적은 저의 글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보군요. 그러니까 님께서는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소박함을 '예찬'하지는 않았다고 어디서 읽으셨나본데 저로서는 앞서 적은 그 책에서 걔가 걔네들을 예찬했다고 읽었습니다. 물론 게르만인을 로마사람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른 건 그들이 로마문화권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일뿐 이라는 결론도 저의 객기의 소산은 아니죠. 말하자면 전문성의 문제인데, 일단의 다국적 교수진을 저자로 하는 위 책에서의 평가에 대해 그걸 용기라고 말하는 한 공학도의 의견이야말로 용기가 아닐까 싶군요.

저는 충분히 "님이 한 말에 근거하여 얘기 하였습니다". 정리해보죠. 님은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은 헐리우드도 아니고 리들리 스콧도 아니다"라면서, 첫째 걔네들이 좀 후지게 산것이 사실이라는 점과 둘째 로마의 국경에 자주 침범하여 로마인들의 괘씸죄를 샀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게르만족의 소박함을 찬양한 무슨 글인가가 있더라는 것과 게르만족의 의회제도 같은 것이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는 평가를 베껴 옮겨서, 그들을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넌센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저는, 게르만족에 대한 이런 식의 묘사는, 묘사될 수 있는 여러 게르만 상 중 감독에 의해 선택된 것이고, 이러한 선택은 그밖의 여러 자질구레한 의도적인 왜곡처럼, 이 영화가 목적하고 있는 강한 남성상을 효과적으로 영상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으로, 분명,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은" 헐리우드(에서의 자본논리)이고 리들리 스콧(의 의식부재)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님의 말에 근거하지 않은 것입니까? (참고로 "이 영화가 게르만 인을 야만족으로 묘사했다고 하는 근거라고 하는 것은 오직 멋진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과 영어가 아닌 그들만의 언어로 소리 쳤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영화를 보기나 하셨는지 몰겠군요. 로마군이 게르만족을 야만족이라고 하는 것을 듣지 못하셨나요? 또, 아래와 같은 영화적 상황을 연상해보십시요. 게르만족의 등장은 목이 잘린 사신의 시체가 말에 매달려 덜렁거리며 나오는 걸로 시작됩니다. 걔네들은 짐승처럼 고함을 지를 뿐 의사소통이란 것조차 서로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로마군은 공격할때 뭔가 전술같은 것을 짜서 줄맞춰서 멋지게 공격하는 반면 게르만족은 기냥 무대포로 덤벼들기만 합니다. 앞서의 책에서 읽은 바와는 달리, 규정된 무장은 고사하고 무슨 소뼈다귀 같은 걸 머리에 쓰고 전쟁에 임하고 있고, 이빨은 열라 누렇습니다. 이게 야만족이 아니면 뭐가 야만족입니까? 제가 리들리 스콧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게르만족의 성격을 파악했다는 겁니까? )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은 헐리우드도 아니고 리들리 스콧도 아니다"라 는 님의 말은 그 말씀의 액면가 그대로나 그 속뜻이나 둘다 말이 안됩니다. 그들을 영화화한 것은 헐리웃 메이져에 고용된 리들리 스콧임은 크레딧 올라갈때 확인되는 바이고, 영화화 가능한 게르만 상이 오로지 야만인뿐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묘사한 것은, 예컨대 우디 알렌의 영화에 대사있는 흑인이 안나오는거에 대한 변명같은 것조차 가능한 상황이 아닙니다.( 사이드의 말에 의하면 태생의 지리적 한계에 의해 서양인들이 어쩔수 없이 갖게 된다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여 영화를 만든 베르톨루치나 데이빗 린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그에 합당한 비평적 평가가 이루어 진 마당에, 이런 뻔히 속보이는 묘사를 해대는 리들리 스콧 정도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딴 영화를 찾자면, 아랍인들을 무슨 테러에 미친 놈처럼 묘사하던 카메룬의 "트루 라이즈"정도일텐데.) 무엇보다 님 스스로가, 두번째글 22~25번째 줄에서 "헐리우드와 리들리 스콧에게 부당한 죄를 씌우지 말자고 한 것은 게르만 족을 야만족처럼 묘사한것에 대한 내용이지요."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게르만족을 야만족으로 묘사함에 있어, 헐리우드와 리들리 스콧이 그 주.체.임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님이야 말로 제가 한 말에 근거하지 않고 얘기하시는데, (저의 처음글에서 게르만족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에 대한 부분은, 그 긴 글 중 단 3줄 뿐입니다!) 애시당초 제가 게르만족의 묘사에 대한 불쾌감을 표시한 것은 이딴 뻔한 수작으로 막시무스를 영웅으로 만듦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이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열라 재수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님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처럼, 저는 리들리 스콧의 멍청한 머릿속과 그 뻔한 장삿속을 비난한 것이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모종의 미덕까지 무시한것은 아닙니다. 수줍은 고백대로, 저 또 한 이 영화의 몇몇 장면에 감탄했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창작의 자유, 또한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누가 아니랩니까? 리들리 스콧에겐 창작의 자유가 있고, 어떤 분들에겐 이 영화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자유가 있는것 처럼, 저한테도 이 영화의 못마땅한 부분을 씹어댈 자유가 있는것일테지요. 문제 있는 영화의 문제점에 대해선 기냥 재밌다고 눈감아주는 반면, 누군가가 뭔가를 씹어대기 시작하면 뭐 그렇게 씹어댈 정도였느냐고, 혹은 그런 식의 평가는 무리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이상한 경향같습니다.

p.s. 님으로서는 편한대로 잊고 있던, 글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다른 일을 들추어낸 것은, 말하자면 님의 명문장을 널리 만방에 알리고 싶음 때문이지요. 단 4개의 단어로, 그분의 글들의 핵심을 묘파해내기란 여간 탁월한 점이 아닐까 싶어서...



--------------------------------------------------------------------------------


보드 (Board) hobby/TheaterWorld
글쓴이 (From) sheeth (twins)
날짜/시간 (Date) 2000년06월08일(목) 10시25분28초
제 목 (Title) [RE:Cocteau] 글래디에이터

제가 처음에 님의 글에 대해 지적한 것은 영화에서 그려진 다소 야만적 모습의 게르만인이 온전히 리들리 스콧의 창작에의한 것으로 믿으시는것 같아서 였습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근거한 조조를 영화 삼국지가 그대로 그렸다고 해서 영화 감독을 비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님의 의도가 처음부터 리들리 스콧이 혹자에 의해 잘못됐다고 여겨질 수도 있는 역사책의 이미지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옮긴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면 제가 잘못 파악한 것이 되겠습니다. 당시 로마와 게르마니아와의 전쟁이 가졌던 성격에 대한 언급은 역시 님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같아 첨부하였습니다. 즉 '로마제국의 영광을 위해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적에 대해 무기를 든 사람들을 그런 야만족으로 묘사하면서..' 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다시 말씀 드린다면 로마가 벌인 게르마니아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게르마니아의 로마 침략에 대한 보복전쟁, 방위전쟁의 성격을 띄었다는 점입니다. 로마군이 멋지게 열맞춰 공격하는 반면 게르만족은 무대포로 덤비는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게르만군의 모습은 좀 과장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하지만 로마군의 모습은 상당히 실제에 가깝다고 여겨집니다.당시 로마군이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에서와 같은 대규모군을 운용하는 조직력과 전술, 병참이었습니다. 반면 게르만인은 당시 용맹하기로 으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한면이 영화에선 다소 무식한 모습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라면 제가 괜한 소리를 한것이 됩니다만 님이 말씀하신 책 찾고 읽는데 걸린 60분정도의 시간은 제 RE가 달린 후에 들이신 것으로 봅니다. ^^;; 소박함에 대한 예찬이라함은 마치 도시 사람이 시골 사람의 생활이 소박하고 아름답다고 예찬 하는 것과 일맥상통 하는 것으로 낙후 하였다의 동의어 일 수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겠습니다. 다국적 교수진이쓴 책에서 예찬에 대한 얘기를 읽으셨다고 하였는데 거기까진 좋습니다만 그 말에서 어떻게 '게르만인을 야만인이라 부른건 그들이 로마권 밖에서 생활 했기 때문일 뿐이다'로 연결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혹 그러한 얘기도 읽으셨지만 옮기지 않으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정말 그러한 내용이 있다면 당연히 저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 하지만 님의 글만으로 보면 비약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로마군이 게르만인을 야만인으로 불렀었습니까? 건 제가 놓쳤군요 죄송합니다^^

A8185-00.jpg

Falling Down 폴링 다운 ★★★
Joel Schumacher  1993  
naver
이 영화에 한동안 수입불가 판정을 받게했던, 재미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막상 보고있자니 별로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런 장면이야 스파이크 리의 <Do The Right Thing>에서도 이미 봤던거고, 뭔가 후천적인 언어습득 뭐 그런거 때문에 영어발음 안좋은거 당연한거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놈들로썬 발음 똑바로 하라고 말하는 거 또한 당연한건데, 그걸 갖고 무슨 민족적 차원의 쫀심에 치유못할 상처라도 입은듯 오버하고 지랄이었는지, 심의하는 인간들의 그 유치한 발상이 국제적으로 쪽팔릴뿐이다. 또,일본어교수님이 말씀하신거처럼, 우리가 일본애들 영어발음에 열라 신기해하며, 조선족의 구강구조가 美국분들의 그것에 일본놈들거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운듯한 착각속에 산다는 것이, 미국놈들 눈에는 얼마나 가소로와보일까, 다시한번 쪽팔릴 뿐이다.(물론, 이건 조선족의 영어발음의 미국놈들의 못알아들음에 대한 쪽팔림이 아니다. 전에 딴지일보에서 했던말처럼, 박찬호가 어쩌구저쩌구 쫌 던지는 반면, 노몬가 어쩌군가가 열라 못던진다고, 그딴걸로 뭔가 민족적 차원의 쾌거를 이룬거처럼 신나하던, 뭐 그딴식의 민족주의의 발현의 유치함이 쪽팔리다는...)

사실, 그 장면에서 문제삼아야할것이 있었다면, 조선족 발음나쁨에대한 사실적 묘사(조선족의 발음이 나쁜지 어쩐지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적 한계땜에 비행기도 못타본 본인으로썬 물론 확인해볼 방법이 없다. 게다가 TV같은데서도 어떤 조선녀가 미국 어디 잔디밭에서 쇠막대를 휘둘렀다느니, 어떤 조선놈이 딴 잔디밭에서 공을 던졌다느니, 혹은 어떤 돈많은조선족의 자식놈들이 그 동네서 열라 잘나가고 있다느니, 이딴소리만 하는 통에 더더욱 확인해볼 방법이 없다. 여튼, 미국놈들이 그렇다니 믿을수밖에. 누구말이라고 이의를 달겠는가...)가 아니라,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방언같은 소리를 한국어라고 지껄여대고 있는 무성의이다. 미제 영화 수입액수가 세계4윈가, 어쩐가라는데, 우리가 개똥으로 보이는건지 저따위 화딱지나는 짓을 하고 있다. 대충 만들어놓아도 막사가서 신기해하며 보니까, 우리가 열라 똥으로 보이나 본데,...그런건가 본데... 글타고 우리가 뭐 어쩔껀 가, 씅질난다고 저 호화찬란삐까뻔쩍한 미제영화를 안사다볼것도 아닌데... 기냥 찌그러져야지. 어따 개기겠느냔 말이다...

나의 속을 뒤집는 명대사, "우리(미국)가 너네(남조선)를 얼마나 도와줬는지 알아?" 그러니까, 광복 직후 같은때, 지들 나라 잉여곡물 처리와 이 코딱지만한 나라의 그 빈약한 농업기반마저 지들나라에 종속시키기 위한 밀가루나눠주기 어쩌구나, 베트남 참전의 댓가로 수십억$대의 <군사>원조를 한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같은데... 저런게 미국민들의 일반적인 인식이라면 열라 역겹고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지들이 딴나라에가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또 그것의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저따위 오만하고도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미디어재벌의 이해관계가 다국적기업이나 군수복합체 같은 그들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에 기인한 것일테지만, 그들의 딴나라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적어도 미국내에선 미국민들의 여론이란 거에 힘입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어쩌구의 원칙을 생각해보면, 뭔가 위험하고 역겨운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분한 윌리엄 포스터의 행동과 사고는 여러모로 논쟁적인데, 포스터라는 캐릭터가 미국민 일반에 대해 얼마나 대표성을 띠고 있고 또 미국민들은 또 그의 행동에 어디까지 공감하는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뭐라고 까대기가 쫌 망설여지지만... 포스터의 그따위 미친짓에는 열라 불쾌한 편견과 무지가 있어 보는 조선족의 맘을 불쾌하게 한다. 포스터는 군수산업체의 종사자로 <조국을 위해 열라 열심히 미사일을 만들었는데> 얼마전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근데 세상은 쓸데없이 세금 쓸려고 멀쩡한 도로에 구멍을 뚫고, 햄버거는 광고와 달리 열라 얇고, 조국을 위해 하는게 없는 성형외과의사들은 궁전같은데서 살고... 여튼간에 세상이 존나 똥같고 잘못되어 있어서 열받은 김에 아무대나 총질을 시작한 거였다. 사회모순 같은거에 온몸으로 저항...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게 조까타서 자기파멸적인 미친 짓을 하는것이다. 근데 이놈이 실질적으로 물리력을 사용하여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대상은 남미계나 깜둥이나 조선족이지 결코 와스프라고 하나... 그쪽 동네가 아니다. 같은 백인이래도 아일랜드계와는 달리 주류사회로의 접근이 용이한 독일계(마이클 더글라스는 독일계이다.)이라는 인종적 우월감? 그놈의 행패의 인종적 근거는 그가 죽인 파시스트 가게주인과 비교하여 별로 다를바가 없다.(사실 포스터가 가게주인을 죽인건 파쇼에 대한 분노나 뭐 그런게 아니라 그놈이 신체적 위해를 가하려했기 때문이었다. 포스터는 게이에 대한 가게주인의 조롱에 눈쌀조차 찌푸리지 않았다는 씬에서 보듯, 파시즘에 대한 별다른 저항감이 없어보인다.) 이건 뭐 남미계나 깜씨동네 같은 빈민촌의 치안상태에 대한 반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포스터의 분노가 공감을 살려면 그 분노의 목표가 정확해야한다는건 자명하다. 이건 뭐 어디서 뺨맞고 어디서 눈흘기는 그런 식이다. 걸프전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현대전은 뭔가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전적으로 힘입어 진행되는 바, 냉전해체 이후 미군수산업체의 대대적인 인원감축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자구책의 의미뿐만 아니라 경영상의 체질개선의 의미가 강했다. (고학력이지만 엔지니어는 아닌) 포스터의 실직은 걔들 나라에 꼽사리 껴서 사는 이민자들이나 주류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빈민가 근처에서 채소나 파는 재미교포들이 원인이 아니라, 군수복합체의 이익에 입각해 굴러가는 미자본주의의 체제가 원인인것이다. (소련 해체이전에도 미국은 전세계무기시장의 40%를 차지했었고 군사지원이 아니라 국가간 무기 판매 형식으로 중동지역에 엄청난 양의 무기를 팔아 먹어 그 지역의 군사적긴장을 조장하고있다는 것은, 케네디 암살의 뒷세력으로 군수복합체의 음모를 제기했던 JFK처럼 공공연한 사실이다. 존나 힘쎈 놈이라 문제제기를 안하다뿐이지...) 이딴식의 개짓거리는 어딘지 낯익다. 일반민중의 경제적 위기감이나 정치적 불만을 딴민족나 사회적 타자에 대한 분노로 치환하면서 우매한 대중을 특유의 선동술로 휘어잡던 그 새끼들. 이건 마치 미친개를 풀어논 개주인한텐 암말않고 골목에서 놀다 물려버린 어린 자식을 혼내는 꼴이다. 흑인폭동이 그들의 변두리 인생의 직접적인 원인인 주류사회의 와스프가 아니라, 남의 나라가서 조빠지게 일할뿐인 조선족한테 일어난거처럼 존나 웃기고도 억울한 알이 아닐수없다.

남의 나라 민중의 머리위에 혹은 밭 가는 조선족 촌부의 머릿위에 떨어질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미국을 위해> 일한 것이라니... 미국의 이익이 전세계 민중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착각이냐? 아니면 미국놈이 아니면 사람으로도 안보이냐? (2000/05/23)

 

B7219-00.jpg

박하사탕 ★★★☆
이창동 1999  
naver

이 영화에 대한 최상급의 남발이, 당연한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딘지 마뜩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수 없다. 설경구에 대한 이창동의 묘사는 묘한 구석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과거 파쇼정권의 개들에게 면죄부를 씌어주자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결국 순수했던 청년기 초입의 그 맑은 눈물로 끝맺음으로 인해 설경구가 겪었던 그 악몽의 역사가 그의 그 반인륜적 행동등의 변명이 될수도 있다는 불쾌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설경구는 이근안과 다르다.(아니, 혹 모른다. 이근안도 뭔가 상처입은 기억이 있어 그딴 개짓거리를 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아는가?) 하지만, 이런식의 동정론은 합당한 역사적 단죄없이 편한대로 잊혀져가는 이딴 혐오스런 망각의 경향에 대한 아무런 경종이 될 수가 없으며, 공지영이나 최영미처럼, 그 매듭을 풀어야할 현재진행형의 역사적 사건에 서둘러 마침표를 찍고 감상적이고 동시에 타자적인 입장에서,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회한에 젖게만 하려는 것 처럼 보이기 쉬운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에 기인한 반인륜적 범죄인지, 설경구처럼 뭔가 상처입은 바가 있는 범죄인지, 아니면 그저 타인에 대한 모욕을 즐기기 때문인 범죄인지의 여부는, 상처입은 사람이 용서하는 근거는 될 수 있지만, 상처준 사람이 변명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되는게 아닐까? 킬링 필드에나 비길만한 동족에 대한 야만적인 학살행위를, 단지 명령이었으니 내 알바 아니다,라고 말하는 80년 광주의 특전사 군인같은게 있다면, 우린 그의 역사관을 어디까지 용납해야하는가? 미 제국주의의 용병이 되어 남의 나라 내전에 명분없이 참가해 수천의 민중을 학살한 무슨 부대 따이한들의 한겨레21에의 항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권에의 야욕 때문에 민간인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명령내린 전두환 노태우 개새끼들이 사형은 고사하고 어딘가에 꼬불쳐둔 돈으로 지금 이 순간도 허허거리며 배 두드리고 있는, 이따위 역겨운 나라에서, 어떻게 함부로 용서니 그런 소릴 할 수 있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고문경찰이라는 건 역사로부터 상처입은 사람이 가야만 하는 유일할 직업이 아니다. 자신의 은신처를 불지않아 고문으로 몇번이나 혼절하는 부모님을 보며 박정희 개파쇼의 몰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던 김지하(김어준처럼 "김지하의 왕자병" 운운할 수 있을 만한 도덕적 입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60세 이하중 누가 있는가? 왕자병은 김어준이다.)나, 분신한 아들을 껴안고 늦은 나이에 사회운동계에 뛰어든 어머니 이소선의 결심은, 어디까지나 성자적이란 말인가?

물론 이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설경구나 그 밖의 배우들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최고의 만족을 주는 영화였고...


...

우리의 최근대사에 대한 역사적 기억력은 기껏해야 20년인가? 전두환이를 멋지 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어찌 박정희를 두둔하는 사람은 어쩌자고 많은가? 그러니까 전두환정권의 개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의 신경계에 미치는 물고문의 효과에 대한 고문학적 지식이 정권유지에 획기적인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는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박정희는 민족을 사랑해서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차원에 입각해서만 정권을 유지했단 말인가, 만주에서 일장기를 가슴팍에 달고 천황의 영광을 위해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던 박정희가? 전태일의 죽음은 그 당시 노동상황이 이례적으로 청계천에서만 살인적이었기 때문인가? 하긴 앞으로 절대 공장같은데서 날품을 팔아야 할 일이 전혀 없을 우리로서는 뭐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리얼하다 못해 역겨운 설경구의 고문장면이 분노를 자아내는건 그것이 <인간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모욕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한 가장 소중하고 근본이 되는 원칙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아니다. 모르는 놈도 있다.) 하지만 웃기는 일이다. 인간에 대한 모욕이, 정치가의 경우에는 백억원대의 기념관으로 찬사받고, 포스비상에서는 "천박함 속의 날카로움과 분석력"이라는 식의 찬사를 받곤 한다는 건... 그래, 어디까지나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어디까지나 즐거울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 여자분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도, 인간에 대한 모욕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들어올 구석이 없다,는 건 새로운 깨침이었다. (2000/05/14)

'movie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Gladiator 글래디에이터 ★★☆  (0) 2013.07.22
Falling Down 폴링 다운 ★★★  (0) 2013.07.22
박하사탕 ★★★☆  (0) 2013.07.22
Shall We Dance? 쉘 위 댄스 ★★★☆  (0) 2013.07.22
The Butcher Boy 푸줏간 소년 ★★★★  (0) 2013.07.22
거짓말 ★★★  (0) 2013.07.22

shallwedanceplakat.jpg

Shall We Dance? 쉘 위 댄스 ★★★☆
수오 마사유키 1996
imdb    naver

며칠전 딴 영화를 DVD로 보다가, 5월달 개봉예정이라는 디즈니의 새영화 "공룡"의 예고편을 봤다. 원래 예고편이란게 본 영화보다 재밌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여튼 수십마리의 공룡이 화면에서 왔다갔다하는걸 날라댕기는 카메라 워킹으로 잡아낸 장면은, 인제 이런 영화까지 만들수 있다는 말이지, 헐...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정말이지, 무슨무슨 발전에 힘입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시각에 한해서이지만, 영화속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뭐 그딴 존 세상이 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돈이 투자가 되어 창조된 저 압도적인 하이퍼리얼리티에서 리오타르적인 숭고함을 느끼는 거야 당연하지만, 나로선 동시에 어떤 경미한 토악질에의 욕구 같은 것도 생기는 거다. 그런 멋지고 열라 비싼 장면이 영화에서 하는 역할과 그런 장면을 쑤셔넣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의도라는게 열라 비위상하기 때문에... 여기 수십마리의 공룡이 뛰어댕기는 장면이 있다. 그건 그 자체로 열라 신기하고 충분한 볼거리인 탓에, 내러티브 내에서의 적절한 작용과 효과같은 것과는 별개로 그자체로서 즐길만하다. 오히려 영화 전편이 어떻게 이 비싼 장면의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는가에 촛점을 맞추어 진다. 이건 한마디로 남녀가 엉킨 장면이 유발하는 모종의 생리학적 반응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조잡하게 얘기를 끼워맞추는 에로영화와 동일한 전략인 거다. 이런게 의미하는 건, 물론 감독의 역량 부족과, 많이 건 놈이 많이 딴다는 야바위판의 규칙의 영화<산업>에의 적용 예이다. 토네이도, 운석충돌, 어쩌구 하는 영화들이 재밌었다면, 컴 앞에 앉아 열라 삽질한 누군가의 노고 덕택일 뿐이다. 그런 류의 영화는 두시간 정도를 넋놓고 보고 나면 열라 허무해질 뿐이다. 또 돈만 있으면 개나소나 다만들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셜위댄스>는 이런 재미에 영화보는게 아닐까 싶어지는 영화였다. 사교댄스에 재미를 붙인 중년 남자의 자아찾기, 뭐 대충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것인지 감이 잡힌다. 전혀 신기할 것도 없고, 로망 포르노로 영화이력을 시작한 감독이라는데도 안타깝게도! 키스씬조차 안나온다. 여기선 이런 식의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렇다. 진부하지 않는가, 그것도 그렇다. 하지만, 여기엔 사람이 있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사회적 타자를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있고 알고 보면 선량한 사람들의 소박한 행복 같은 게 있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어쩌자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도 좋아지고, 좀 고달프긴 하지만 함 힘내서 다시 살아볼까, 그런 유쾌함이 있다. 이런게 감동아닌가? 이런건, 뭐 수만마리의 공룡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운석을 박치기로 깨부수어 지구평화를 지킨다, 같은 영화적 상상력으론 절대 얻어낼 수 없는 수준이란 말이다. 나한테 최고의 영화는 데이빗 린치 처럼 뭔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몰겠는 영화나 돈 존나 많네 쟤들 그런 생각만 들뿐인 카메룬 류의 영화가 아니라, 말하자면 켄 로치 영화같은 거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나... 역시 진부하지만 <중앙역>같은 영화가 <메트릭스>같은 열라 재밌는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란 말이다.

주인공 여배우는 실제 무슨 유명한 발레리나...라는데, 어딘지 좀 부자연스런 이목구비지않은가, 싶지만서도 어쨌건 심금을 울리는 미모였당. 특히... 가슴선의 실루엣은 코끝을 찌르르할 정도로 예뻤다...라고 써도되나 몰겠다... ^^ 야쿠쇼 코지는 말할 것도 없이 멋진 배우이고, 그 딸네미로 나온 왠 여자애도 상당히 귀엽다... 허...  (2000/05/13)



'movie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Falling Down 폴링 다운 ★★★  (0) 2013.07.22
박하사탕 ★★★☆  (0) 2013.07.22
Shall We Dance? 쉘 위 댄스 ★★★☆  (0) 2013.07.22
The Butcher Boy 푸줏간 소년 ★★★★  (0) 2013.07.22
거짓말 ★★★  (0) 2013.07.22
Insider 인사이더 ★★★☆  (0) 2013.07.22

butcher.jpg

The Butcher Boy 푸줏간 소년 ★★★★
Neil Jordan   1997
imdb

며칠전 이 영화를 봤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막가파 소년의 반사회적 행동들을 어떻게 파악해야하는가, 하는 점인데, 그 시각의 진보성에 있어, 이전의 허잡한 transsexual영화 <크라잉 게임>이나( 다들 하는 오해와달리 크라잉 게임은 게이영화가 아니다... 게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게이영화라고 소개했던 울나라 그 멍청한 문화부기자들한테 열렬한 경멸을 보낸다.), 그 말많았던 <마이클 콜린즈>에 비해, 훨씬 상회하는 완성도와 장족의 발전을 이 영화는 보이고 있다. 사실, 그의 인드림스에 절망했던 나로서는, 그의 예전 코미디영화<천사탈주>의 그 썰렁함이 그의 영화의 진면목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더랬는데, 나름대로 멋진 구석도 있는 감독이었나보다.

맛간 사이코 브래디는 정말 맛이 간 놈인가? 맛이 갔다고 치자. 맛간 놈은 그놈뿐인가? 때는 60년대 말이고 쿠바에 소련제 미사일 몇대가 들어온걸 지들 제국에 대한 강력하고 위협적인 도발로 파악한 "위대한 대통령" 케네디가, 씨바,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서, 아일랜드 촌구석에 사는 우매한 민중들조차 언제 지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패닉에 빠지게하고, 동시에 전지구 인민들의 하찮은 목숨을 담보로한 정치적 도박을 자행한 존나 황당한 <용기>를 과시함으로 인해, 자유의 수호자, 혹은 강력한 미국의 대통령의 찬사와 함께, 남조선 미취학 아동을 상대로한 칼라풀한 위인전기목록에 빠지지않고 오르게 되는 영광을 얻게된 역사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나로서는 CIA를 통한 정치공작을 그만두고, 세계평화를 위해 베트남에 직접 군투입을 지시한 그 오입쟁이가 왜 극동의 이 코딱지만한 나라의 얼라들의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되는 바이지만... 인제 브래드가 미쳤나 따져보자. 아마도 미쳤을 것이다. 사람죽여놓고 희희덕 거리는 놈은 정상으로 보기 힘들므로. 근데, 브래드는 왜 그딴 미친짓을 하나? 이 영화는 그걸 친절히 갈켜주고 있다. 브래드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미제 영화들의 세계관이다. 외계인이 침공해서 미녀를 덥치는 SF와(물론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5,6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외계인침공영화들은, 메카시 어쩌구하는 집단광기, 공산당놈들이 언제 지들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세계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백악관의 정치적야심과 군수산업체 등등의 잇속에 의해조작되고 확대된, 집단광기가 스크린의 투영된 것이다.), 지들이 머릿가죽 벗겨 죽인 수백만은 생각지도 않고 지들의 야만행위에 삶의 터전을 지키려 자위공격을 했던 순박한 인디언들을 강간과 살인을 일삼는 인간백정으로 묘사하는 서부영화들과, 돈때문이라면 사람목숨같은게 중요하냐,는, 자본주의 윤리의 핵심을 묘파하는 갱영화들과( 씨바, 돈 없으면 병원침대 위에서도 그냥 죽어야하는, 이 축복받을 세상이여!), 슈퍼맨 류의 미제 초인이 지구를 구하는 감동적인 만화들이다. (영화 크레딧과 함께, 만화속 등장인물과 거 무슨 교도관을 동일시하는 첫장면은 그래서 유치한대로 재밌었다.)

브래드는 학교에 안 가다뿐이지, 어른들이 보여주고 갈켜주는대로 잘도 기억하고 길.들.여.진.다. 씨바, 브래드가 보기에 조와 자기의 피로나눈 우정을 금가게 하고 마을전체에 악의 기운을 뻗치게 만든 그 아줌마는 돼지에 불과하고 부처보이로서 돼지잡는건 직업적 소명이라 할만하다. 어린남자에 보고 자위하는 경건한 신부로 대표되는, 또 그런 종교적 권위가 그다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마을(핵전쟁의 패닉에서, 성모가 강림할 거라고 믿고 집회같은걸 하는 마을 사람들)은, 브래드가 파악하기엔 외계인 침공으로 사람들이 돼지로 변해 버린 영화속의 그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초윤리적인 결단을 필요로하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핵전쟁의 공포를 종교적 광기로 치환하는 <정상적인> 마을 사람의 정신상태와 돼지로 파악되는 악당을 도살한 브래드,중에 누가 더 미쳤는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엠에프 어쩌구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장난다고 설레발쳐대던 제도권 언론과 방송, 미디어의 그 강력한 선전과 그 조정자로서의 초국가적인 기업들의 이익챙기기에, 내가 잘리는게 아니라면 정리해고쯤 당연하건 아닌가, 혹은, 이 총체적 국가난국의 시기에 저 미친놈들은 지들 뱃속만 생각하고 파업하고 지랄이야, 어쩌구... 냉전시대의 핵전쟁 공포는 그저 우매한 시대의 헤프닝이었을 뿐이고, 우리는 우리가 처한 경제적 역사적 조건들을 사실 그대로 조작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자신할 만큼, 우리는 똑똑한가? 아엠에프의 요구대로 했더니, 씨바 경제가 존나 안정되고 발전했다더라는 식의 모범사례라고 소개되었던 멕시코가, 그 덕에 더욱 경체침체와 빈부격차와 나프타 어쩌구 하는 종속적 경제체제에 더욱 깊이 함몰하게 되고 말았다는 후일담같은 건 도대체... 허허허...

이시점에서 생각나는건, 조 단테의 "마티니"인데, 다들 함 보시라... (2000/04/23)

 

'movie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하사탕 ★★★☆  (0) 2013.07.22
Shall We Dance? 쉘 위 댄스 ★★★☆  (0) 2013.07.22
The Butcher Boy 푸줏간 소년 ★★★★  (0) 2013.07.22
거짓말 ★★★  (0) 2013.07.22
Insider 인사이더 ★★★☆  (0) 2013.07.22
오래전 낙서  (0) 2013.07.22

Lies.jpg

거짓말
장선우 1999
naver

-언젠지 모르겠는데 여튼 무척 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저는 앞서, (거짓말에서) 성기노출의 시도와 여성에 의한 새디즘이 가부장체제에 전복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고, 이것이 거짓말 상영금지조치의 원인이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소리를 써놓긴 했지만,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비난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듣기 싫은 까닭에, 구질구질한 소리 몇자 적겠습니다.

영화는, 다른 대중매체와 같이, 현실질서의 재현이고 강화의 수단으로 쓰입니다. (여기에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헐리우드 영화를 비롯하여,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성폭력의 과장된 재현인 저 숱한 포르노까지 포함합니다.) 그런까닭에 소위 B급영화나 인디영화라 이름붙여진 영화들의 과격하고 이단적인 세계관 같은 것들을, 자본의 논리에 충실히 복종하는 주류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들지요. 예컨대, 존 카펜터가 최근작 "슬레이어"같은 영화에서, 카톨릭의 최고위 성직자가 벰파이어와 결탁한다는 류의 설정은, 미치지않는 이상 카메론 같은 감독은 절대 안하지요.

기존 권력질서나 헤게모니 유지를 공고히하는 영화적 소재나 접근방식은, 야한 영화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 종류의 "금기"의 형태로 영화제작자들에게 강제되는데, 예컨대 남성의 성기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 허용하지만( 닐 조단의 "크라잉 게임"이나 김창동의 "박하사탕") 여성의 성기는 절대 노출되면 안된다거나 미성년자의 섹스는 안된다거나 새디즘이나 수간등의 묘사는 안된다거나, 요즘이야 안그렇지만 가정을 등진 유부녀들이 잘먹고 잘사는 걸로 끝나선 안된다거나, 여성의 벗은 가슴은 정면에서 촬영하면 안된다거나... 수도 없죠. 이와 같은 금기는 물론, 현존질서의 유지와 확대,강화의 목적을 위해 역할하는 것으로, 때문에 켄 러셀같은 감독은 악마가 수녀를 강간한다든지 하는 과격한 방식으로, 엿먹으라고 손가락을 내밀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류의 금기는 왜 금기여야 할까요? ( 졸라 잘난척한다고 생각지 말아주십쇼. 기냥 제 의견일 뿐입니다.) 오늘은 2000년 2월 16일이지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대적 성관념의 잔재입니다. 그것은 대충 생식주의, 연령주의, 이성애주의로 요약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성행위들은 죄악시되고, 시대에 따라서는 사형되기도 했으며(영국에서는 1800년대중반까지 동성애행위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정신병자나 성정체성 확립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병리화되기도 했고, 그와 더불어 사회적 권력관계로부터의 배제는 물론, 심지어 감금,구속도 불사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핵가족"이 자본주의 구성의 최소단위로서 그 의미를 재정립함과 더불어, 즐거운 나의 집, 어쩌구 하는 가족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사회질서의 근간 같은 걸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가부장제의 확립과 강화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남자, 여자를 갈라놓은 후, 남자에 의한 지배를, 법률적 종교적 생물학적으로 정당화,자연화하였으며 이에대해 개기는 존재에 대해선 단죄의 칼을 뽑았던 것이지요. 예컨대, 중세 마녀사냥이 가부장적 지배에서 벗어나있는 노처녀, 과부, 이혼녀 등을 그 대상으로 했듯이, 오늘날에는 이혼녀인 주제에 위자료도 안받게다는 수상한 여자 "백지연"을 스캔들의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식이지요.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섹스 본연의 목적을 "생식"으로 한정짓고자 하는 "생식주의"는, 생식능력이 없는 청소년이나 노인네들의 성생활(?)을 변태적인 것, 희극적인 것, 천인공로할 짓 등으로 매도해왔고( 성욕을 갖고 있는 노인들이라니, 얼마나 엽기적입니까?), 영화에서의 자위장면이란 항상 그다지도 불결하게 묘사되며( 남녀간의 성관계와 솔로의 자위중 어느게 더욱 일상적입니까? ), 게이는 에이즈의 주범으로 과학적으로 낙인찍혔고, ... 지배자로서의 남성은 성에 있어서도 주체의 지위에 놓여있어 여성을 성적대상물로 규정하고 통제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여성의 성욕이란 본성상 악에 물들기 쉽고 파멸적이라, 남자의 적절한 통제아래에 놓여있지 않는다면 위험천만하다는 인식, 혹은 사유재산의 상속자로서의 장자의 유전적 정통성(?)을 확보하고자하는 의지는, 아랍권이나 아프리카에서 여성의 음핵을 제거하는 할례로 지금도 자행되고 있고, 영화에서라면 팜므 파탈로 대변되는 수많은 섹시한 악녀들을 양산해냈지요.(야한여자=위험한여자)

이제 성기노출과 새디즘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영화에서 여자의 성기는 절대로 가려져야 할 어떤 것입니다. 그 안의 정체불명의 어떤 막은 순결의 상징이고 결혼식날 까지 봉해져야할 어떤 것으로, "순결 이데올로기"야말로 가부장체제에서 여성지배의 핵심인 것입니다. 때문에 영화에선 하다못해 여자애기 고추조차 나오지 않으며, 여성의 성기노출은 한 영화가 뽀르노냐 아니냐(즉 위험한 영화냐 아니냐)의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되어왔습니다. 성기를 내놓아도 되는 여자는 창녀뿐이고 그것도 음침한 곳에서 손님만 봐야하는 것이지요. 요약하면, 영화에서 여자의 성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여성에게 강제되는 성적이데올로기의 가장 첨예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으로, 그와 같은 시도가 단지 성욕을 자극하고자 하는 수단이 아니라면, 가장 전복적인 형태의 시위가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브라를 벗어던지자며 상반신을 노출하고 행진하는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의도같은 겁니다. (당신이 성기노출이라는 방식을 불쾌하게 여기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기노출이 단지 에로틱함 만을 조장하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겁니다.) 영화에서라면 잡아먹을 듯 위협적으로 클로즈업되는 "감각의제국"같은 경우가 있겠습니다.

다음은 새디즘입니다. 보통 새디즘은 변태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데, 여기서 도대체 어떤 행위까지가 변태고, 어떤 행동이 변태인지 아닌지는 누가 정했냐, 는 긴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적 쾌락의 유도책으로서의 사도-매저키즘은 상호간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분위기 만들려고 포도주 마시는거나 마찬가지로, 보다 강한 만족을 위한, 좀 별스런 시도일 뿐입니다. 이게 왜 변태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요? 정녕 비난받아야 할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상호간의 동의에 의한 새디즘은 변태로 몰아부쳐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저 숱한 에로영화의 폭력적인 강간씬이나, 특히 첨엔 강간으로 시작했으나 끝낸 화간으로 끝난다는 식의 더욱 역겨운 설정등은 왜 가만 보아넘기냐는 겁니다. 이것은, 남성의 성욕은 동물적이고 폭발적이라 적당한(?) 여건만 주어지면 아무 여자한테나 덤벼드는 거라는, 가장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상식에 기초한 것으로, 우리가 강간영화에 익숙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자에 의해 자행되는 강간을 묘사하는 영화도 있었 으나 그건 단지 성적주체인 남성들에게 색다른 쾌감을 느끼게 하기위한 시도일 뿐입니다. 제가 거짓말에서의 구타씬이 역시 전복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비생식적 행위인 새디즘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는 앞서말한 "생식주의"에 대한 개김으로 읽힐 수 있고, 무엇보다 그 새디즘이 여성에 의해 자행되는 상황이라면, 그건 가부장제적 지배에 대한 가장 정공법적인 개김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거짓말에서, 주인공 남자가 여자한테 맞으면서 옛날 아버지한테 맞는걸 회상하며, 자신은 맞을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유치하도록 노골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인공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의 억압의 기억, 그런 그를 때리며 제의화된 권력을 행사하는 20살이상 작은 여!자!

 

'movie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Shall We Dance? 쉘 위 댄스 ★★★☆  (0) 2013.07.22
The Butcher Boy 푸줏간 소년 ★★★★  (0) 2013.07.22
거짓말 ★★★  (0) 2013.07.22
Insider 인사이더 ★★★☆  (0) 2013.07.22
오래전 낙서  (0) 2013.07.22
review의 성격과 별점에 대한 변명  (0) 2013.07.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