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걸다 우원회] 내게 창자를 보여도!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see/see_19.asp

- 2003년 1월 6일 딴지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이번  기사도 너무 길어 대폭 수정된 글이 올라갔습니다.
아래 기사는 original version입니다. -


    97년, 의무병 보직을 갖고 있던 본 우원은 파주 모 부대에서 빨간약과 각종 소화제를 무기삼아 수백명의 전우들을 상대로 불법의료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당시 본 우원의 사수였던 고 병장은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던 <세일러문>의 열혈팬이었다. 밥먹으러 가는 부대원들에게 군가 대신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를 부르게 하고, 세라의 변신모드를 흉내해며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쳐대는 그 병장의 기행을 지켜보며, 군대가 참 여러사람 망쳐놓는구나, 본 우원, 혀를 끌끌 찼더랬다. 하지만 고 병장의 취향은 보는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하는 구석이 있을지언정, 소대 막내를 향해 “문 파워 액션!”을 날리지만 않는다면, 딴사람들에게 딱히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고병장의 취향은 부적절했을 뿐이지,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선 단지 자신의 호불호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 취향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취미생활에 간섭하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예컨대, 당신은 “크래들 오브 필쓰” 같은 사악하고 거친 음악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분기탱천할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유키 구라모토”의 달착지근한 연주곡들은 누군가의 구역질을 자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영화판은 어떨까?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지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맘놓고 즐기고 있는가? 당신이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이나 로맨틱한 키쓰씬, 아니면 쭉빵걸의 삼삼한 허벅지나 꽃미남의 빨래판 같은 복근에 환호하는 사람이라면, 관객으로서의 당신의 취향은 존중받거나 적어도 이해는 받는다. 하지만 당신이 낭자하게 피칠갑된 창자나 뇌가 등장하는 고어 장면에 환장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정신건강을 우려하거나 당신의 취향에 대해 분개한 주위사람들의 참견에 사는게 피곤해질 것이다. 영화 관객으로서의 당신의 권리도 처참히 짓밟힌다. 그런 장면들은 정상적인 루트로는 도무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한니발>에서 렉터박사가 열어놓은 뚜껑속에는 뇌 대신 검정 스프레이가 뿌려져있었고, <반지의 제왕> 특수를 노려 DVD로 출시된 피터 잭슨의 장편 데뷔작 <고무인간의 최후>는 이전 출시된 비디오판과 다름없이 고어장면들이 삭제되었다.



영화에서 창자를 보고 싶어하는 고어팬들의 입장은 이처럼 이중으로 어렵다. 한반도를 텔레토비가 뛰어놀던 꼬꼬마 동산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등급위 위원들의 음모도 음모려니와, 영화속 고어장면에 대한 관객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양성화해야되."라는 주장은 진보적 성관념의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금방 꺼낸 창자로 줄넘기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보았으면 해."라는 고백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하겠다는 자살행위일 따름이다. 고어장면을 보고 느끼는 영화적 희열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고 저속한 취향이며 변태라는 증거일 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탓이다. 잔인한 장면에 대한 이런 부정적 견해들 때문에 고어팬들은 자신의 취향에 자괴감이나 죄책감을 갖게 되고,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의 칼부림보다 더 잔인한 난도질에 걸레짝이 되어버린 호러영화에 대해서도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는 실정이다. 고어나 호러영화 팬 사이에선 국내출시 비됴나 DVD는 안보느니만 못하다는 게 상식으로 통하고 있는 탓에 비싼 돈 들여가며 외국의 전문 싸이트에서 고가에 소스를 구입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영화 속 노출씬과는 달리 고어씬에 대해선 삭제의 부당성 자체가 검토되지 않는 분위기다. 고어팬들은 특유의 자폐적 관람문화로 인해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쳐를 내보이지 않고, 고어를 싫어하는 관객들은 일반정서나 청소년 보호 운운하며 등급위가 고어장면을 잘라내는 데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본 우원은 영화에서 창자적출씬을 삭제하는 짓은 창자적출 행위 자체만큼이나 폭력적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건 소수일지언정 특정 관객의 취향을 무시하고 그들의 볼 권리를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등급위 위원들이야 원래 제정신들이 아니니까, 예컨대 <데드 얼라이브>같은 걸출한 고어영화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창자가 날라다닌다는 이유로 17분을 삭제하는 뻘짓거리를 할 수도 있다 치자. 하지만 단지 자신의 섬세하고 고상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자적출과 사지절단 장면을 삭제하는 데에 당신이 심정적으로 동의한다면, 그건 등급위 위원들의 가위질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폭력이다. 자신의 편협한 윤리관과 예술관에 어긋나는 장면이라면 타인의 볼 권리마저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파쇼적 가치관이 바로 등급위 가위질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어씬을 싫어하는 이유의 상당부분은 오해와 편견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오해와 편견이라는 것을 당신이 인정하게 된다면 영화 속 고어씬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지게 될 것이다. 또 이유있는 노출씬이 그러하듯이 이유있는 고어씬도 가위질 삭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본 우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고어씬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고어씬이 관객에게 입힐 엄청난 정신적 데미지에 대한 우려다. 창자를 끄집어내는 장면이 허용된다면 관객 중 몇 명은 영화를 보다가 극심한 공포감에 심장마비를 일으킬지 모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 중 몇 명은 잠재적인 연쇄살인범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기우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고어씬을 접해왔지만 그런 고어씬들이 관객으로부터 우려할만한 반응을 일으켰다는 보고는 없었다.



고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 중 하나는 목 자르기다. 그런데 등급위의 심의는 다른 부위와는 달리 유독 목 자르기에 너그럽다. 톰 슐만의 <가방속의 8머리>라는 영화는 제목 그대로 영화내내 잘려진 머리 8개가 굴러다닌다. 그런데도 국내에는 15세관람가로 출시되었다.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에는 목 자르는 장면이 13번이나 나온다. 팀 버튼은 목 자르는 장면을 외화면으로 처리되거나 그림자로 암시하는 대신, 칼날이 목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횡단하는 장면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고, 잘린 단면에 드러난 경추와 설곡하근의 선명한 질감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 리얼한 목 자르기 장면에 관객 중 일부가 혼절했다거나 이 영화에 감동받은 청소년이 식칼을 들고 설쳤다는 소식을 본 우원 접한 바 없다. 잘리는 부위가 목이 아니라 복부라면 어떨까? 아마 관객들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창자적출은 목 자르기 보다 쇼킹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기만 그것은 단지 관객들이 목 자르기를 더 많이 접했기 때문이지, 창자적출 행위가 본질적으로 더 잔인해서가 아니다.



고어씬에 대한 우려가 기우일 뿐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사실 극장 밖에 있다. 어린이를 비롯한 수많은 관람자들이 지금도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는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를 관람했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전시된 진짜 시체들에 충격을 받아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문은 본 우원 아직 듣지 못했다. 진짜 시체를 만져보기까지 하는 이 관객들이 가짜 시체에서 창자가 꺼내지는 장면에 기절할까? 그동안 등급위 위원들이 고어씬을 다 잘라낸 것은 단지 이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일 뿐이다. 고어씬을 보면 관객들이 맛이 가버릴만큼 충격을 받을 거라는 착각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고어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은 고어씬 자체의 존재가치를 부정한다. 이런 편견은 키에슬롭스키의 <색깔 3부작>이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3부작>보다 예술적으로 더욱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이 영화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된다. 또한 교육을 위해 진짜 시체를 전시하는 것은 허용해도 단지 재미를 위해 영화에서 마네킹과 동물의 내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의 근거이기도 하다.



고어라는 영화적 장치의 미학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천한 영화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어씬은 창조성없는 이류 감독들의 선정주의의 볼모가 아니다. 1963년 허셀 고든 루이스의 <피의 향연>으로 시작된 고어영화의 역사는 피와 내장을 무기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과 주제의 외연을 확대해 왔으며, 고어씬이 갖는 전복적 잠재력에 주목한 작가들-고다르, 빠졸리니, 브뉘엘, 그린어웨이, 올리베이라, 크로넨버그, 로메로 등은 때문에 자신의 영화에 고어씬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영화 속 고어씬이 뜨거운 예술혼을 구현하거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교육적 효과를 주려는 대신, 단지 관객들을 ꡐ재미ꡑ있게 하려고 삽입된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피터 잭슨이나 샘 레이미의 초기작들은 분명 <반지의 제왕>이나 <스파이더 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차원의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고, 어떤 관객은 오히려 전자들이 더 재밌을 수도 있다.



고어에 대한 가장 심각한 편견은 고어씬 혹은 고어팬을 향한 도덕적 비난이다. 고어씬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며 고어씬에 대한 매혹은 부도덕하고 변태적 취향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오해를 가진 사람들은 고어영화를 스너프와 동일시하며 고어영화를 도덕적 타락의 가장 추악한 증거로 파악한다. 물론 실제 살인과 고문을 담은 스너프 필름이 세상에 없으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고어씬이 들어 있는 입수가능한 상업 영화중에는 스너프 필름이 없다.



고어씬은 사람을 두 동강내는 마술과 비슷하다. 마술사가 아무리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두 동강낼 저 미녀가 100% 안전하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알고 있다. 혹 그 미녀가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비명 자체가 쇼의 일부임을 알고 있으므로 웃어 넘길 수 있는 것이다. 고어씬을 즐기는 관객의 심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어떤 고어 팬은 ‘비웃는 재미’에 고어씬을 즐긴다. 예를 들어 루치오 풀치의 <비욘드>에서 얼굴에 황산이 쏟아져 얼굴이 녹아내리는 장면에 신나하는 고어팬은, 한눈에 마네킹임을 알아볼 수 있는 그 어설픈 특수효과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장면을 리얼하다고 우겨대는 뻔뻔함이나 고어씬에 대한 순수할 정도로 진지한 감독의 집착을 감탄하거나 비웃는 것이다. 고어팬들의 이런 심리를 잘 이해하는 감독들은 때문에 그들의 고어영화를 잔인하거나 역겨운 것으로 만들기보다 차라리 웃긴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가장 완성도 있는 고어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런 웃긴 영화, 즉 스플래터 영화에서 발견된다. 어느 소설가가 말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마지막 자기방어는 구역질과 웃음이다." 당신이 구역질하는 사람이라면 고어팬은 웃는 사람일뿐이다. 당신과 다르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심지어 고어영화가 심각할 정도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고어팬들이 그런 장면에 환호하는 경우일지라도, 그들은 패륜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어팬은 뽀르노팬과 달리 영화의 리얼리티를 즐긴다기보다, 눈앞에 펼쳐지는 고어씬과 관객으로서의 그 절대안전 사이의 간극을 즐긴다. 그들은 단지 (현실이 아닌) 영화적 상황에 환호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어떤 영화를 잔인하고 부도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조엘 리드의 초절정 새디스트 고어영화 <피를 빠는 변태들>이나 어린이 목까지 잘라대는 구예도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는 어떤 면에서 <타이타닉>보다 덜 잔인한다. <타이타닉>은 블록버스터에 값하는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극중 로즈와 잭의 가슴아픈 로맨스를 완성하기 위해, 결국 영화의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여 보다 많은 수익을 남기기 위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반면 <변태들>과 <팔선반점>은 인간본성 속에 내재한 잔인성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고어영화로서의 상품성을 높여 돈 좀 만져보기 위해 (본 우원이 직접 세어본 바에 의하면) 기껏 9명과 11명의 사람을 죽일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의 구미에 맞는 낭만적 로맨스라는 코드를 완성하기 위해 수백명을 죽이는 것은 괜찮지만, 소수 관객의 구미에 맞는 내장적출이라는 코드를 완성하기 위해 10여명 정도 죽이는 것은 안된다는 말인가? <타이타닉>에서 폼나게 죽어가는 수백명의 엑스트라들은 장차 있을 잭의 죽음을 더욱 애닯게 하는 "배경"일 뿐이다. 하지만 <인육만두>의 9명은 결국 내장을 드러낼지언정 머리에 식칼이 꽂힐 때까지 살려고 바둥대는 ꡐ인간ꡑ들이다. <타이타닉>의 엑스트라들은 관객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한꺼번에 수십명씩 죽어나간다. 단지 배경을 메꾸기 위해 거기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육만두>의 희생자들의 죽음은 하나하나 충분히 비참하고 끔찍하게 음미된다. "인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어느 영화의 살인 의도가 더 잔인하단 말인가?



고어영화는 생각만큼 위험하고 나쁜 영화가 아니다. 고어씬을 즐기는 사람은 정신병자나 잠재적인 살인마가 아니다. 하지만 고어씬을 싫어하는 사람으로선 고어씬에 대한 우리의 심의관행이 보다 너그러워지기를 굳이 희망할 이유가 없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 우원 생각엔 영화 속 고어씬이 허용되는 것은 고어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중요한 사안이다.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선 고어씬의 허용 여부는 우리 사회의 관용성에 대한 시금석이다. 또한 어렵지않게 이뤄낼 수 있는 변화다. 뽀르노 허용이 성정치학과 관계된 복잡한 사안인 반면, 고어씬은 단지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에 관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사안이다. 게다가 그것이 미칠 사회적 여파도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고어씬은 본질적으로 소수의 취향일 뿐이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사회는 특정 고어씬에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가장 극단적인 취향이라 여겨지는 고어씬까지 허용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나와 (그것이 소수일지라도)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보다 너그러운 사회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고어씬의 허용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니들 애인이 해주는 갑작스런 첫키스처럼 즐거운 선물이 될 것이다. 고어팬들은 무삭제 소스를 구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고, 고어에 관심없었던 사람들에겐 그들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쇼킹하고 재미있고 웃기는 영화들이 적어도 수십편 늘어날 것이다. 무삭제판으로 만나는 <시체 3부작>은 <대부 3부작>만큼 흥미진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어씬의 허용은 우리 영화산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본 우원이 작년에 본 가장 재밌는 영화는 미이케 다카시의 <이치 더 킬러>다. 갈데까지 가보자는 이 영화의 고어씬에 많은 관객들이 고개를 젓겠지만 그런 관객들조차 이 영화가 뿜어내는 그 강렬한 에너지와 예측불허의 상상력에 감탄했을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영화'산업'의 중심국이라고 말들하지만, <이치 더 킬러>같은 영화까지 만들 수 있는 나라와 그런 영화를 볼 수조차 없는 나라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감독과 관객의 상상력에 족쇄를 채우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어느 나라의 영화판이 더욱 창조적일까?



우리에게 창자를 보여달라. 그거 보여준다고 큰일나는 거 아니란 말이다.


<반지의 제왕>보다 <데드 얼라이브>를 더 좋아하는 꼭도 lachrym@postech.ac.kr

 

고삐리의 꼴림에 대하여 -부제: 고삐리, 꼴려도 되는가? (original version)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2115/mo2114et_901.asp

- 2002년 11월 25일 딴지일보에 실린 기사의 original version입니다.
A4 11장 분량으로 너무 길어서 딴지일보는 6장 정도분량으로 대폭 줄여진 version이 올라갔습니다. -


영상물등급위원회 우원님들께서 “과도하게 일반국민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하셨던 “죽어도좋아”가 일반극장에서 상영되기로 했다는 뉴스를 접한 순간, 본 우원 똥꼬털이 바르르 떨리는 전율을 느꼈더랬다. 우린 이제 조뙤버린 것이다, 다음과 같은 메카니즘에 따라!: 할매 할배가 서로 빨고 핥는 기겁스런 빠굴장면을 극장에서 본 조선의 여인네들은 빠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생겨 향후 남정네들과의 잠자리를 거부한다 → 그 후유증으로 출산율은 떨어지고 남정네들은 살 의욕을 잃어 매사에 무기력해진다 → 이에 약해진 국력을 틈타 왜놈이나 양코쟁이들이 이 땅에 침공하고 한민족은 또다시 식민치하에 빠진다! 그렇다, 영진공 우원님들의 경고를 무시하면 우리 민족은 이따위 곤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아,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걱정마시라. 우리의 영등위 우원님들이 민족의 위기를 모른채 하실리 없지 않은가? 우원님들께선 영화사측이 알아서 “색보정으로 화면의 일부를 어둡게 처리”하도록 강한 염력을 발휘하시어, 노인들 빠굴에조차 꼴리고마는 대중의 천박한 욕망과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 그리고 우원님들 지들 밥그릇까지 모두 아우를수 있는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내신 것이다. 아, 이 어찌 신묘하다하지 않으리요?

“죽어도좋아” 이전에도 영등위 우원님들의 심기를 건드린 불경한 영화들은 여러 편 있었다. 그러나 “죽어도좋아”는 우매한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영등위의 존립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거짓말”같은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한 영화다. 왜 대중들은 이 영화의 일반상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을까? “거짓말”같은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유쾌한 코미디일 수도 있고 쓰레기일 수도 있지만, “죽어도좋아”는 누가봐도 ‘좋은영화’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잊거나 무시하고 있던 사실, ‘노인들도 젊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하고 빠굴도 하는 사람이다’라는 당연한 썰을 모두가 공감할만한 방식으로 풀어내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영화를 일반 극장에서 상영못하게 하려는 우원님들의 우국충정이 오히려 대중들로 하여금 열받게 만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일반 관객은 영화의 맥락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기노출이나 적나라한 빠굴장면만 나오면 치명적인 정신적 데미지만을 입게 될 뿐이라고 영등위 우원들은 착각하고 있지만, 일반 관객들도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를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일반 관객들은 노골적인 빠굴씬에서 지들 나름대로 메시지를 읽어내고 그게 맘에 들어 “죽어도좋아”의 일반상영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영등위 우원들만 그 사실을 모르고 지들 맘대로 봐라 마라 지랄들을 하고 계시니 어찌 뚜껑이 안열리겠는가?

물론 “죽어도좋아”를 ‘좋은영화’라고 평가하려면, 이 영화가 이 땅의 빠굴사에 남긴 크나큰 족적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죽어도좋아”는 ‘노인이 되도 빠굴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잘.’이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한 최초의 한국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좋은 걸 노인이 되서도 꾸준히 할 수 있을까? 혹 망측하다며 할망구한테 버림받고 자식놈들에게 따당하는게 아닐까’ 밀려드는 불안감에 잠 못이루며 전전긍긍하던 선남선녀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던 차에 “죽어도좋아”의 두 어르신들께서 나이를 잊게 만드는 절륜한 발기력으로, 최소동작으로 최대효과를 볼 수 있는 하이 테크닉을 몸소 시연하시며 후학의 모범이 되어주시니, 암울할 것 같던 노년기에 광명이 비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우리들의 노년은 구원받았다. 폭싹 늙어서도 알콩달콩 재미를 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앞에 열린 신천지에 마냥 기뻐만 하기엔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다. 우리네 인생사에는 맘껏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암울한 시기가 여전히 있는 탓이다. 한 마리 천사에 다름아니던 초,중학생 시절은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온갖 야리꾸리한 상상이 쉴새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밤마다 해소할 길 없는 불끈거림에 괴로워하던 고등학생 시절은 어떤가? “죽어도좋아” 이전 노인네들의 성욕처럼 고등학생 시절의 꼴림도 분명 존재하지만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말하기 힘들다. 노인네들의 꼴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단지 ‘체면’에 관한 문제라면, (특히 여)고삐리의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개인의 ‘성도덕’이나 ‘사회윤리’에 관한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중년 남자가 “여고생에게도 맘껏 꼴릴 자유를 달라”라고 주장한다면 누가 그를 제정신으로 볼 것인가? 따라서 고삐리, 특히 여고삐리의 꼴림에 관해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수도 있는, 위험하다면 위험하달 수도 있는 행위다. 하지만 딴지 영진공이 보통 조직인가? 할 말이 있으면 체면불구 염치불구 꼴리는대로 말하는, 시대의 양심이고 등불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본 우원 함 디벼보기로 했다. 고삐리들의 꼴림에 대해서, 영화는 고삐리의 꼴림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성범죄자 신상공개의 시국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를 첨 봤을 때, 본 우원은 본인의 눈을 의심했다. ‘스무살, 섹스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라고? 그러니까 조선땅의 묘령의 아낙네들이 빠굴도 궁금했더란 말인가? 본 우원 두뇌 속의 정교한 데이터베이스 안에는 빠굴을 궁금해하는 스무 살 안팍의 여성이 등장하는 ‘현실감있는’ 한국 영화는 거의 없었다.(에로영화가 묘사하는 꼴림의 판타지는 논외로 하자.) 특히 여고삐리들은 식물처럼 무성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간혹 섹스하는 여삐리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반사회적 인간이거나(“나쁜영화” “눈물”),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청춘”), 그것도 아니면 조만간 귀신이 될 운명인(“폰” “여고괴담2”) 캐릭터들이다. 비교적 정상적인 여고삐리가 원조교제를 하는 “버스,정류장”같은 흥미로운 영화도 있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희는 빠굴 자체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원조교제를 시작한 동기도 가족에 대한 모종의 반항심이지 꼴림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요약하면 한국 영화에선 정상적인 여고삐리라면 빠굴을 경멸하고 빠굴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영화밖 현실도 정녕 이러하다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이렇게 건전한 성관념을 가진 예비신부들이 즐비하니, 이 땅의 숫컷들은 적자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할 가능성을 확보한 뿌듯함을 가슴에 품은 채, 초야에 시트를 물들인 혈흔을 찾을 일만 남은 게 아닌가!

빠굴과 정상적인 여고딩을 함께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금기는, 한국 영화의 다른 두 가지 경향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우선, 식물의 성욕을 갖고 있는 여고삐리와 달리 달리 조선 땅의 남고삐리들은 짐승의 성욕을 갖고 있다. 최근 극장 개봉한 “몽정기”에 잘 나타나듯이, 남자 등장인물의 중,고딩 시절을 묘사하는 장면에는 으레 옆집 누나, 뒷집 과부, 학교 교생, 어릴적 고향여자친구, 홍등가 미쓰리에 얽힌 성적 경험담이 당연하다는 듯이 삽입된다. 운이 좋아 실제 관계를 갖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영화 속의 남고삐리들이 적극적인 성욕을 갖고 있으며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그 환락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빠굴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안전한 세상에 사는 여고삐리들과는 달리, 한국 영화의 성인 여성들은 가혹한 성적 폭력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엔 폭력과 함께 시작된 강간이 결국엔 화간으로 발전한다는 에로영화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감동적인’ 영화들도 호평 속에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나쁜남자” “오아시스”가 그러하다. 외국영화 중에선 변태 새디스트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즈”가 단연 눈에 띤다. 전신마비인 남편의 성적 망상을 현실화하며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어떤 여인네의 고달픈 인생을 그린 이 영화를 보며 영화판의 글쟁이들은 ‘구원’이 어쨌다느니 썰을 풀기도 하셨더랬다. 사실 고난받는 여성을 통해 구원 어쩌구 뻘소리를 해대는 영화들은 이전에도 줄기차게 만들어졌고 개중엔 소위 걸작으로 추앙받는 영화도 많다. 칼 드라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뜨”,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같은 영화들이 그것이다. “오아시스”을 포함해서 이런 영화들이 뛰어난 영화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의 감독이 여자였다면 그렇게 손쉽게 여성을 강간하고 내팽개치고 지근지근 밟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결국 이런 영화들이 업자들 말로 ‘가부장적 폭력’을 재현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

만약 조선 땅의 여고삐리들은 섹스에 도통 관심이 없고 모든 성적 폭력에서 자유롭다면 본 우원, 더 할 얘기가 없겠다. 그렇지만 우선 전자에 대해선 (앞으로 더 디벼볼테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개뿔도 안그렇다는 걸 니가 알고 내가 알고 영화 만드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조선 영화속의 여삐리들은 꼴림없고 성폭력없는 세상에서 화초처럼 마냥 행복하다. 물론 여고삐리들의 성과 관련하여 특정한 방식으로만 영화가 만들어지는 경향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성적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여고삐리의 성욕을 영화의 소재로 삼는 것은 결국 숫컷들의 너저분한 꼴림에의 욕구에 야합하여 돈 좀 만져보겠다는 노골적인 수작일 공산이 크다. 게다가 성범죄자공개라는 살생부가 떠도는 심란한 시국에 어떤 정신나간 작자가 꼴림에 몸이 단 여고삐리를 영화에 등장시킬 배짱이 있겠는가?

이렇듯 영화속 한국은 빳빳해진 조슬 휘드르며 설쳐대는 남고삐리들과 빠굴이 뭐에여 천사같은 표정을 짓는 여고삐리들이 공존하는 희안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외국의 고삐리들의 쎅쑤라이뿌는 어떠할까? 내친김에 이것도 함 디벼보기로 하자.

남자 미성년자의 발정지랄생쑈가 등장하는 외국 영화는 니들도 알다시피 부지기수다. “아메리칸 파이”같은 미제 10대 섹스코미디를 귀두로 하여, 20대 유부녀와 두 명의 고삐리들이 트리플 빠굴을 선보이는 “이 투 마마”같은 멕시코 영화까지, 세계 각지에서 궁극의 빠굴지락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남고삐리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온 것이다. 본 우원이 본 가장 최소연령의 바꿀남은 79년 프란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과 함께 깐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독일영화 “양철북”에 나온다. 이 영화에는 노벨상 수상작가인 귄터 그라스의 원작대로 세 살의 신체를 가진 오스카가 18살 가정부 마리아와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물 우원님들을 모시고 사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쇼킹한 장면를 비디오와 DVD로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의아하지만 한편으론 그 분들의 취향을 고려한다면 전혀 이해못할 케이스도 아니라고 본다. “춘향뎐”처럼 깐느에 출품될 정도로 예술성이 높은 영화에 대해선 (극중 연령이나 실제 배우들의 나이로나) 16세의 미성년자들의 화끈한 빠굴씬이 있어도 12세관람가를 때리시는 분들이고보니, 깐느 그랑프리 수상같이 예술성만빵인 영화정도라면 까짓 3세 아동의 빠굴씬이 문제겠는가?

별다른 죄책감이나 순결의식 없이 빠굴하는 건 여고삐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크림”의 히로인 시드니는 ‘성관계를 가진 여자 캐릭터는 죽는다’는 공포영화의 규칙을 비웃듯 남친과 빠굴하고도 버젓이 살아남는다. “트레인스포팅”에선 14살 먹은 다이앤이 부모의 묵인하에 능숙한 테크닉으로 마크와 성관계를 맺고, 오르가즘을 느껴보는 것이 소원인 “걸스 온 탑”의 17살 세 여고삐리들은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위해 다리에 알이 배기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제이미 배빗 감독의 발랄한 레즈비언 영화 “하지만 난 치어리더에요”에서 그래험의 촉촉한 입술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던 고교 치어리더 미건은 결국 그녀와 감미로운 성관계를 맺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빠굴 여고삐리로는 최근 DVD로 출시된 우디 알렌의 “맨하탄”에 나오는 열일곱살 트레이시(이 역을 맡은 Mariel Hemingway는 니들이 아는 그 헤밍웨이의 친손녀이며,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실제로 17살이었다)가 있다. 42살 먹은 아이삭과 연애(원조교제?)를 하기 전에 이미 3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그녀는, 아이삭의 중년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영국으로 유학가지 말라며 투정(!)부리는 아이삭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도 할만큼 어른스럽다. "6개월은 긴 시간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다 변하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져요."

물론 한국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섹스하는 여고삐리를 악녀나 범죄자와 연관짓는 외국 영화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일렉션”에서 학교 선생과 성관계를 맺었으나 선생만 애궂게 해고 당하고 자기는 뻔뻔하게 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트레이시가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트레이시의 성관계는 영화 내내 트레이시의 숙적 짐이 갖고 있는 그녀에 대한 성적 욕망을 설명하기 위함이지, 고삐리 주제에 빠굴씩이나 하는 부도덕한 여자로 매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이라는 살떨리는 리얼한 영화로 공포영화팬을 열광시켰던 존 맥노튼의 느와르 풍 영화 “와일드 씽”에는 돈을 위해 살인도 마다않는 여고삐리 켈리와 수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고삐리로서 선생과 트리플 빠굴할 정도이니 살인인들 못하랴는 식의 연관성을 찾긴 힘들다. 그녀들은 빠굴이 아니라도 충분히 사악하며 그녀들의 빠굴씬도 팜므 파탈(위험한 여자)로서의 강렬한 성적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 따름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된 방식은 여고삐리의 성욕을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이 영화의 켈리와 수지는 블루베이 ‘하이스쿨’의 학생들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에는 이들을 여대생으로 묘사한다. 노인네들 빠굴도 용납못하는 인간들이 여고삐리의 트리플 섹스를 용납할리 없지 않은가?)

요약하면 성욕이란 건 남고삐리와 일탈적인 여고삐리한테만 관계된 일이고 묘사하는 한국 영화와 달리, 외국 영화에선 고삐리 정도면 남녀할 것없이 자신의 성욕을 자연스럽게 향유하며 그에 대해 별다른 죄악감을 갖지 않는다. “[한국영화] 남고삐리의 성욕=정상, 여고삐리의 성욕= 일탈; [외국영화] 남고삐리의 성욕 = 여고삐리의 성욕 = 정상”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똑같은 고삐린데 왜 나라마다 이렇게 다른 것일까?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말하기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남고삐리들끼리는 바다를 건너서 공유되는 발기충천이 왜 여고삐리에게는 바다 저쪽에서만 나타나냔 말이다. 자랑스런 조선민족의 혈통은 여고삐리라는 특정한 발달단계에 성욕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알려지지 않은 유전자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사회는 여고삐리도 성욕을 갖고 있고 빠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며, 그것이 현실화될 경우 그 여고삐리를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신중절의 타이밍을 놓쳐 임신사실이 뽀록난 여고삐리를 자퇴나 전학의 형태로 학교 밖으로 내치는 것처럼 말이다.

여고삐리들의 성적(혹은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행위에 대해 남고삐리보다 더 강한 통제와 규율이 가해지는 경향은, 흔히 그녀들을 다양한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되고 그로인해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조치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 남고삐리들의 경우 위생상의 조언이나 학업상의 이유, 혹은 범죄 예방 차원의 제제가 아니라면 그들의 폭주하는 꼴림에 거의 아무런 통제도 가해지지 않는다. 매춘부와 관계하면 성병에 걸리기 쉽다, 지나치게 빠굴만 생각하면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남자는 세가지 ‘끝’을 조심하지 않으면 인생 조지기 쉽다,는 식의 얘기를, 그들의 선생과 애비와 선배로부터 듣게 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삐리 주제에 빠굴하면 니 인생 조뙨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삐리 정도 되었으면 여물데 다 여물었기 때문에 그들의 꼴림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고,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꼴림을 억누르라고 주문하는 경우에도 그들의 성욕 자체는 ‘당연히’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남고삐리와 여고삐리의 성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남고삐리인 당신이 오늘도 변함없이 뽀르노 싸이트를 돌아댕기며 수작업에 여념이 없는 걸 애비가 봤다고 치자. 말이 통하는 애비라면 적당히 하라는 충고와 함께 ‘우리 아들도 이젠 다 컸구나’ 감동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말이 통하는 애미가 그 광경을 봤다면 일단은 문을 닫아주고 나중에 조용히 불러다가 “양말은 빨아놓은 걸로 사용해라”같은 위생에 관한 조언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만한 조선의 딸이 “섹스 아카데미”의 제이니처럼 “쉬즈 올 댓”을 보며 아침부터 바이브레이터를 돌려댄다면 애미애비가 퍽도 좋아하겠다. 그러고보면 한국 영화에 나타난 그 명백한 차이는 남고삐리/여고삐리의 꼴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허용정도와 일반적인 상식을 정확히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남고삐리와는 달리 한국의 정상적인 여고삐리는 정말 빠굴과는 전혀 관련없이 사는 족속들일까? 영화속의 여고삐리는 현실속의 여고삐리의 쎅쑤라이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니들도 대충 짐작하겠지만, 16~18세 여고삐리의 쎅쑤라이프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한국 영화의 묘사는 순 개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2000년 하반기에 전국 고교생 2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고삐리의 16.5%가 애무를, 8.1%가 빠굴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98년 청소년 보호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문고 여고삐리 5.1%, 실업고 여고삐리 21.6%가 ‘자발적으로’ 바꿀을 한 경험이 있으며, 97년에 대한가족협회에서 조사한 자료에는 여고삐리의 15.2%가 자위행위를, 7.5%가 (강요나 성폭력에 의한 것이 아닌) 빠굴을 해봤다고 나와 있다. 그 밖의 여러 통계치마다 정확한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97년에서 2000년 사이에 적게는 5.4%에서 많게는 10.2%에 이르는 여고삐리가 실제 빠굴의 경험이 있다고 밝혔으며, 니들도 동의하겠지만, 2002년도에는 이보다 더 많은 빠굴 여고삐리가 있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 한 반 인원을 40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한 반에 여덟 명 정도는 키쓰를 비롯한 다양한 애무를 시도해봤으며, 세 네 명 정도는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빠굴을 해 본 적이 있었다, 2~5년 전에 이미! 한편 같은 기간 남고삐리의 경우에는 13~17.7%가 빠굴경험이 있으며, 대한가족계획협회가 96,97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빠굴 경험이 있는 15~19세의 남자 청소년 중 44%가 매춘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남고삐리들이 여고삐리보다 7~8%정도 빠굴경험이 더 많긴 하지만 여고삐리들도 적지 않은 수가 빠굴 혹은 그 전초전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통계적으로 엄밀하게 현실을 반영해야할 필요는 없다. 우디 알렌의 영화에서 대사 있는 흑인을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그의 영화를 쓰레기라거나 구라라고 욕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물론 재수없기는 하다.) 그런데도 굳이 본 우원이 한국 영화에 여고삐리의 빠굴라이뿌가 순 개뻥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랄지랄하는 이유는, 한국 영화의 그런 경향이 우리 사회가 남성과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잣대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꼴림은 죄악이다. 숫컷의 꼴림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매춘은 필요악이다, 매춘부는 가부장적 폭력의 희생양이지만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이중잣대는 시대착오적인 망발이다. 그리고 그런 편견이 부당하다고 인정한다면, 지난 9월 24일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표한 성범죄자 671명 중 16세 이상의 청소년을 성매매한 74명은 그 명단에 포함된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앞으로 할 얘기가 얘기니 만큼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가지 밝혀둘 것들이 있다. 우선 본 우원,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에 대해 찬성한다. 그것이 위헌의 소지가 있든지 어쩌든지간에, 예컨대 11세 여아를 강간미수,살해하고 17세 여자애를 강간살해한 전남에 김** 같은 놈은 명단 공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쥐를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우원이 앞으로 할 얘기는 강간, 성매매알선, 강제추행 등의 성범죄자들이 아니라 원조교제를 포함한 청소년 성매매자에 한한다. 그것도 16~18세에 해당하는 여고삐리를 상대로한 성매매자말이다. 왜 하필 16~18세냐하면, 우선 그것은 여고삐리들의 연령이고, 16세는 우리나라 외의 다른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의제강간 기준 연령, 즉 그 이하의 연령대의 미성년자와 빠굴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형사처벌되는 일종의 빠굴 마지노선이며, 18세는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호받는 최고연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들이 앞으로 읽을 본 우원의 글에서 청소년이나 미성년자라 함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16~18세의 여고삐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쓸데없는 시비를 걸지 말기 바란다.)

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라는 제도가 목적하는 건 사실 ‘청소년’ 성보호가 아니라 ‘여자청소년’ 성보호다. 이번 신상공개에는 17세 남자 청소년을 성매수한 경기도 거주 홍모씨라는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녀는 전체 성매수범 178명 중 유일한 여성이고 동시에 전체 671명의 성범죄자 중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케이스다. 앞서 살펴본대로, 남자빠굴청소년이 여자빠굴청소년보다 1.5~2배 정도 많은데도 전체 성범죄 대상자의 비율은 1:670로 오히려 여자청소년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남자청소년과 성인여성이 관계된 성범죄적 상황에서 남자청소년이 희생자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혹 희생자였다 하더라도 그런 경험이 남자청소년에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빠굴을 했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왕재수좋은 사건이지 인생 조뙨 사건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앞서 통계에 나타나듯이 빠굴 남자 청소년의 40% 이상은 그들이 직접 빠굴경험을 하기 위해 구매자로서 매춘여성을 찾기까지 한다. 요컨대 “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은 “남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범죄도 동일한 처벌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여자청소년의 경우와는 달리 빠굴상황에서 남자청소년을 희생자로 봐야할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결국 ‘여자청소년’의 성보호를 위한 법률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자청소년이 성적 착취의 희생자인 경우가 많다는 건 사실이므로 ‘(여자)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청소년성보호법)’을 제정한 것은 어쨌거나 환영할 일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냔 말이다. 니들도 알다시피 청소년성보호법은 기존의 윤락행위 방지법이 사문화되어 여자 청소년의 성보호에 실효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여자청소년 성보호라는 지상의 목표를 위해 청소년성보호법을 제정해야한다는 취지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청소년성보호법과 그에 근거한 성범죄자 신상공개라는 제도는 “여자청소년의 성은 여성 일반의 성보다 더 보호할 가치가 있고 남자청소년의 성보다 더 통제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가치판단 하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앞서 “한국 영화에서 여고삐리의 빠굴이 묘사되는 방식이 한국영화의 다른 두 가지 경향과 대비된다”는 본 우원의 주장을 놀랍게도 현실속에서 재현하고 있기도 하다! 까먹었을 니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한국 영화의 그 두 가지 경향이란, 첫째 정상적인 여고삐리는 빠굴에 관심이 없거나 빠굴을 혐오하는 반면, 남고삐리는 통제불가능한 빠굴의지를 갖고 있다, 둘째, 온실의 화초처럼 안전한 여고삐리들과 달리 성인 여성들은 가혹한 성적 폭력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청소년성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네 가지 방식의 매매춘 행위(남자청소년:성인여자, 남자청소년:여자청소년, 성인남자:성인여자, 성인남자:여자청소년) 중 현실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성인남자:여자청소년의 경우 뿐이다. 즉 남자청소년의 (사는 행위로서의) 매매춘은 올웨이즈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성차별/연령차별적인 처벌방식이 타당하려면, 행위무능력자로서의 미성년자라는 연령적 고려 이외에, 남자청소년의 꼴림은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이고, 동시에 신체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성인남자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욕을 가진 여자청소년의 경우와 달리, 통제와 교화의 대상이 안된다는 가정까지 동의해야한다. 또한 청소년성보호법은 청소년의 성을 사는 행위에 대한 법률이지 청소년이 성을 사는 행위에 관한 법률이 아니므로, 성을 사는 행위의 ‘주체’일 경우는 종종 있지만 성을 사는 행위의 ‘상대방(객체)’이 될 일은 거의 없는 남자청소년은 애시당초 이 법률이 개입하려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청소년보호법 제1조대로 “청소년을 보호,구제하여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 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라면, 남자고삐리들이 성인 여성이나 여자청소년의 성을 사는 것은 그들이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데 별 지장없는 사건이란 말인가? 물론이다! 대한민국같은 마초사회에서 불알 여물만큼 여문 놈이 창녀 한 번 안사봤다면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한편 청소년보호법과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물론 의도한 효과는 아니겠지만, 여러 빠굴남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우선 앞서 말한 우디 알렌의 최근 출시작 “맨하탄”에 나오는 아이삭 같은 남자가 그 중 한명이다. 아무리 이 영화가 로맨스라고 주장하더라도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기 이전이었다면 42살 먹은 남자와 17살 먹은 여고삐리가 한 침대에 누워 "오늘은 당신이 원하던 그 이상한 체위로 해줄께"같은 대사를 씨부리는 영화가 국내에 출시될리 없을 것이다. 우디 알렌의 영화들이 열댓편이나 출시되어 있는 마당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맨하탄”이 늦게나마 출시될 수 있었던 것은, 청소년보호법이 “청소년 성매매”를 “청소년에게 금품 기타 재산상 이익이나 직무•편의 제공 등 대가를 제공하거나 이를 약속하고 성교 등을 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원조교제와 로맨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남자들에게 확실한 면책의 구실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보호법 제정에 쾌재를 부른 또다른 숫컷으로는 성인 매춘여성을 애용하는 족속들을 들 수 있겠다. 실효성 있는 성매매 관련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자청소년의 성보호만을 목적으로 법률이 제정된 것은 그들에게 강력한 변명거리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법적 처벌의 대상은 아니잖아?“ 라며,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을 정치적, 도덕적 죄책감을 한방에 날려버린 매춘 빠굴남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렇듯 의도했든 그렇지않든간에 청소년성보호법은 성인 매춘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손을 들어준 것이고, 이것은 한국 영화에서 여고삐리 이외의 여성들이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향과 유사하다.

매춘행위를 성토하고 있는 듯한 주장을 계속 하고 있지만 사실 본 우원은 매춘을 포함한 상업적 섹스 서비스가 필요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섹스 서비스는 필요지 필요악이 아니란 말이다. 성적 쾌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상업적 서비스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하거나 그런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왜 나쁘단 말인가? 많은 열혈 페미니스트들이 매춘산업과 관련하여 여성의 상품화에 분개하고 있지만 사실 여성의 성을 포함한 여성성 자체는 언제나 상품화의 대상이었고, 그 중 일부는 아무런 반감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컨대 올해 흥행순위 1위를 차지한 “집으로...”는 모성애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악한 상품이었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수십년째 유지하고 있는 북한이 보낸 응원단은 하나같이 미녀들이었다. 게다가 월드컵 때 한국의 여성들은 한국 대표팀의 놀라운 성적만큼이나 그라운드를 누비는 탄탄한 몸에 탄성을 질러댔으며 TV에는 어느 순간부터 앞섶을 풀어해친 꽃미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말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세상은 남자들만큼이나 여자들도 자신의 성욕에 당당하고, 지금의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여성들도 자유롭게 섹스 서비스를 이용하며 그로부터 성적 쾌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A.I"에서 주드 로가 연기했던 지골로 로봇처럼 여성 고객이 원하는 로맨틱 무드와 감미로운 섹스를 제공해주는 그런 서비스를 여성들도 죄책감이나 수치심없이 사용할 수 있는 세상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능한’ 세계일 뿐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올해 1월 군산 개복동에서처럼 이중잠금키로 가둬놓은채 매춘행위를 강요하고 급기야 산채로 태워죽이기까지하는 이따위 야만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속에서 "섹스 산업은 필요악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의 정액 한 방울은 매춘녀의 피 한 양동이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씨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착취와 폭력 위에서 운영되는 매춘 산업에 당신이 돈을 뿌려댄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에 공범으로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도 성인 여성에 대한 성매매는 사회적으로 묵인되고 있으며, 이와는 달리 청소년 매매춘은 강력한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국 청소년 매매춘은 성인 여성 매매춘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더욱 파렴치한 범죄행위란 말인가? 정말 그런지 안그런지는 청소년 매매춘의 대표적인 형태인 원조교제와 성인 여성의 매춘행위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락행위임에 관한 법문의 정의를 볼 때, 원조교제도 명백한 매춘행위다. 하지만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에도 나타나듯이, 원조교제는 일반적인 성인 여성의 매매춘과 몇가지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원조교제를 하는 여자청소년의 경우 직업적 매춘여성과 달리 상대를 선택할 수 있고 화대에 대한 일종의 교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포주에 의한 인신구속이나 폭행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거래에 이상이 있을 경우 상대적으로 성인 남자가 입는 사회적 타격이 크기 때문에 성인 남자와의 관계를 협상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원조교제를 하는 여자청소년이 직업적 여성매춘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보기 힘들다. 한편 원조교제를 하는 여성이 청소년이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인에 비해 판단능력이나 사고능력, 이해능력이 떨어지는,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상대로 성매매를 했기 때문에 했기 때문에 원조교제가 성인 매춘여성에 대한 성매매보다 더욱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간한 다른 자료는 “십대 초반의 청소년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고능력, 이해능력, 그리고 판단능력들에서 확실히 성인에 비하여 열등하지만, 십대 중반 이후의 청소년들은 이 모든 요소들에서 성인수준의 성숙도를 갖”고 있고, “동일한 연령의 청소년들에서도 능력발달은 큰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 십대 중반 이후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능력은 연령기준에 의해 일률적으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고, 각 개인의 특성과 환경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10대 후반의 여고삐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아니며, 따라서 단지 18세 이하의 청소년을 성매매했기 때문에 성인 여성에 대한 성매매보다 더 파렴치한 행위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9월에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공개한 671명의 청소년 성범죄자 명단에는 16~18세의 여자 청소년을 성매매한 73명의 성인 남자와 17세의 남자 청소년을 성매매한 1명의 성인 여성이 포함되어 있다. 공개된 범죄사실만으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원조교제를 통해 이루어진 성매매일 것이다. 이들의 청소년 성매매 행위가 다른 파렴치범들과 같은 명단에 오를만큼 극악한 죄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18세 청소년과 단 1회의 성매매를 한 서울의 신모씨가 9세 여아를 강간미수,살해,사체유기한 인천의 곽모씨와 동일한 명단에 오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어쨌든 청소년 성매매는 막아야하니까 명단공개는 불가피하다 치자. 그렇다면 16~18세 여자 청소년에 대한 평균 4회 미만의 성매매가, 한국의 성인남자 상당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고 있는 성인 여성 매춘에 대한 매춘보다 더 파렴치하고 극악한 죄라는 말인가? 성인 매춘 여성들은 산채로 불에 타죽든 말든 방관한 채 여고삐리들의 순결만 악착같이 보호해주면 된단 말인가? 왜, 그녀들은 단지 창녀일 뿐이까?

물론 청소년 성매매는 변영의 여지가 없는 범죄행위다. 청소년 성매매의 상당수는 매춘지역에서 산업적인 매춘 행태로 이루어지고 있고, 성매매를 경험한 많은 청소년들은 신체적,정서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성보호법의 제정과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환영할만한 제도다. 그러나 명단에 포함된 성매매자들 중 몇몇은 한국 성인 남자, 심지어 일부 남자 청소년 사회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성인 여성을 상대로한 매매춘 행위들보다 더 나쁜 죄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저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지만 당신이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니는 오입질도 충분히 저들의 행위만큼 나쁜 죄질일 수 있단 얘기다. 여고삐리의 성은 성인 여성의 성보다 더욱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남자의 성욕은 통제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춘행위는 필요악이라는, 이따위 헛소리가 통용되는 현실이 당신한테는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명단에 오른 74명으로선 조까튼 상황이라고 생각할 법하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본 우원, “걸스 온 탑”처럼 꼴림에 온몸을 배배꼬는 여고삐리가 등장하는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물론 본 우원이 롤리타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영화를 극장에서 범죄의식이나 죄책감없이 볼 수 있을만큼,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드물고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자유로운 그런 사회가 얼렁 왔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어때, 너네들도 그런 영화 보고 싶지?

           p.s. 본 우원이 참고한 자료들이 궁금하면 여길 눌러보시라.

           1. 철학과현실, 10대의 성은 왜 ‘보호’의 대상인가?, 2002년, 가을호
           2. 당대비평, 누가,어떻게 ‘성 매매’를 바라보는가?, 2002년, 봄호
           3. 이성숙,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4. 남미애,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연구, 2001
           
http://dju.ac.kr/~kwonhb/papers/selfdet.htm
           5. 박광배, 아동,청소년의 성적 행위결정 능력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 청소년보호위원회, 2000 (청소년보호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youth.go.kr/ 자료실에 가면 다운 받을 수 있다.)
           6. 김시업, 청소년의 ‘원조교제’와 ‘매춘’에 관한 심리학적 근거에 관한 연구, 청소년 보호위원회, 2000 (이것도...)
           7. 국내 중고생 성의식과 성교육 실태 조사결과, 시사저널 2001.3.8.

 

[영진공] 고삐리의 꼴림에 대하여(published version)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2115/mo2114et_901.asp



- 2002년 11월 25일 딴지일보에 실린 기사입니다. 딴지일보에 실린 두번째 기사지요.
역시 원고료는 못받았지만 제 기사 읽은 사람들로부터 나름대로 반응이 있어 무척 기분 좋았습니다.
최종 수정이 반영이 안되어, 딴지 일보에 실린 기사와는 조금 다른 내용입니다.
original version은 A4 11장 짜리였는데 실제로 딴지일보에 실린 기사는 6장 정도로 대폭 줄였습니다.-


  "죽어도좋아" 가 일반극장에서 상영된다고 한다. 니들은 좋겠다. 빠굴기술을 수십년 연마한 절륜한 테크니션들의 현란한 몸사위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영환 꼭 챙겨보고 실전에 응용하는 것이 궁극의 빠굴지락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후학된 도리라 하겠다. 물론 "죽어도좋아"가 이 땅의 빠굴사에 남긴 크나큰 좆적은 리얼 시츄에이션으로 장인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다는 교육적 효과 이상이다. 빠굴을 해도 되는 연령을 정해놓고 그 이외의 빠굴은 온갖 호들갑 떨며 변태화시키던 우리 사회의 완고한 "연령주의/생식주의적 빠굴관"이, 저 늙은 연인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실로 산산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빠굴라이프는 족히 20년은 연장되었다!

내친 김에 좀 더 가보자. 짧디 짧은 우리네 인생에 빠굴가능연령이 늘어난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 마리 천사에 다름아니던 초,중고 시절이 무리라면, 고삐리 시절은 어떨가? 온갖 야리꾸리한 상상이 쉴새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밤마다 해소할 길 없는 불끈거림에 괴로워하던 그 시절의 설익은 꼴림도 허락한다면, 우리의 빠굴라이프는 3년 더 연장될 수 있다. 하지만 고삐리들의 꼴림에 대해 얘기를 꺼내기란 노인의 경우보다 더 힘들다. 노인네들의 꼴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단지 '체면'에 관한 문제라면, (특히 여)고삐리의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개인의 '성도덕'이나 '사회윤리'에 관한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중년 남자가 "여고생에게도 맘껏 꼴릴 자유를 달라"라고 주장한다면 누가 그를 제정신으로 볼 것인가? 하지만 ‘최대다수의 최대꼴림’이라는 중차대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본 우원, 사회적으로 생매장될 위험을 감수하며 고삐리의 꼴림에 관해 함 디벼보기로 했다. 영화속에 나타난 고삐리의 꼴림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반영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우끼고 자빠진 빠굴관에 대해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를 첨 봤을 때, 본 우원은 본인의 눈을 의심했다. "스무살, 섹스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라고? 그러니까 이 땅의 묘령의 아낙네들이 빠굴도 궁금했더란 말이냐? 본 우원 두뇌 속의 정교한 데이터베이스 안에는 빠굴을 궁금해하는 스무 살 안팍의 여성이 등장하는 '현실감있는'한국 영화가 거의 없다.(에로영화가 묘사하는 꼴림의 판타지는 논외로 하자.) 특히 여고삐리들은 식물처럼 무성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간혹 빠굴하는 여삐리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반사회적 인간이거나(“나쁜영화”“눈물”),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거나(“청춘”), 그것도 아니면 조만간 귀신이 될 운명인(“폰”“여고괴담2”) 캐릭터들이다. 비교적 정상적인 여고삐리가 원조교제를 하는 “버스,정류장”같은 영화도 있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희는 빠굴 자체를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원조교제를 시작한 동기도 삶에 대한 환멸이지 꼴림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요약하면 한국 영화에선 정상적인 여고삐리라면 빠굴을 경멸하고 빠굴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영화밖 현실도 정녕 이러하다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이렇게 건전한 성관념을 가진 예비신부들이 즐비하니, 이 땅의 숫컷들은 적자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할 가능성을 확보한 뿌듯함을 가슴에 품은 채, 초야에 시트를 물들인 혈흔을 찾을 일만 남은 게 아니겠는가!



빠굴과 정상적인 여고딩을 함께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금기는, 한국 영화의 다른 두 가지 경향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우선, 식물의 성욕을 갖고 있는 여고삐리와 달리 달리 조선 땅의 남고삐리들은 짐승의 성욕을 갖고 있다. 최근 극장 개봉한 “몽정기”에 잘 나타나듯이, 남자 등장인물의 중,고딩 시절을 묘사하는 장면에는 으레 옆집 누나, 뒷집 과부, 학교 교생, 어릴적 고향여자친구, 홍등가 미쓰리에 얽힌 성적 경험담이 당연하다는 듯이 삽입된다. 운이 좋아 실제 관계를 갖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영화 속의 남고삐리들이 적극적인 성욕을 갖고 있으며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그 환락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음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빠굴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는 듯한 안전한 세상에 사는 여고삐리들과는 달리, 한국 영화의 성인 여성들은 가혹한 성적 폭력에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최근엔 폭력과 함께 시작된 강간이 결국엔 화간으로 발전한다는 에로영화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감동적인' 영화들도 호평 속에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나쁜남자”“오아시스”)



이렇듯 영화속 한국은 빳빳해진 조슬 휘두르며 설쳐대는 남고삐리들과 빠굴이 뭐에여 천사같은 표정을 짓는 여고삐리들이 공존하는 희한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외국 고삐리들의 빠굴라이프는 어떠할까? 내친김에 이것도 함 디벼보기로 하자.



남고삐리의 빠굴이 등장하는 외국 영화는 부지기수다. “아메리칸파이”같은 미제 10대 섹스코미디를 귀두로 하여, 20대 유부녀와 두 명의 고삐리들이 트리플 빠굴을 선보이는 “이 투 마마”같은 멕시코 영화까지,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는 발정지랄생쑈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다. 별다른 죄책감이나 순결의식 없이 빠굴하는 건 여고삐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크림”의 히로인 시드니는 성적으로 문란한 10대를 난도질로 처단하던 이전 시대 슬래셔 무비의 관습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남자친구와 빠굴하지만 결국 완결편까지 무사히 살아남는다. “트레인스포팅”에선 14살 먹은 다이앤이 부모의 묵인하에 능숙한 테크닉으로 마크와 한 빠굴하고, 오르가즘을 느껴보는 것이 소원인 “걸스 온 탑”의 17살 세 여고삐리들은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위해 다리에 알이 배기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제이미 배빗 감독의 발랄한 레즈비언 영화 “하지만 난 치어리더에요”에서 그래험의 촉촉한 입술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던 고교 치어리더 미건은 결국 그녀와 감미로운 성관계를 맺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빠굴 여고삐리로는 우디 알렌의 “맨하탄”에 나오는 트레이시가 있다. 42살 먹은 아이삭과 한 침대에 누워 "오늘은 당신이 원하던 그 이상한 체위로 해줄께요"같은 대사를 읊어대는 17세의 이 조숙한 여고삐리는, 아이삭의 중년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투정(!)부리는 아이삭에게 세상 다 산 것 같은 충고도 할만큼 어른스럽다.



물론 한국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빠굴하는 여고삐리를 악녀나 범죄자와 연관짓는 외국 영화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ꡒ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ꡓ이라는 살떨리는 리얼한 영화로 공포영화팬을 열광시켰던 존 맥노튼의 느와르 풍 영화 ꡒ와일드 씽ꡓ에는 돈을 위해 살인도 마다않는 여고삐리 켈리와 수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여고비리로서 빠굴하는 것은 살인범에게나 있을수 있을만한 부도덕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선보이는 선생과의 트리플 빠굴은 선생을 그들의 복잡한 트릭에 말려들게 하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팜므 파탈(위험한 여자)로서의 강렬한 성적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 따름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된 방식은 여고삐리의 성욕을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이 영화의 켈리와 수지는 블루베이 "하이스쿨"의 학생들이다. 그런데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에는 이들을 여대생으로 묘사한다. 노인네들 빠굴도 용납못하는 인간들이 여고삐리의 트리플 빠굴을 용납할리 없지 않은가?)



요약하면 성욕이란 건 남고삐리와 일탈적인 여고삐리한테만 관계된 일이라고 묘사하는 한국 영화와 달리, 외국 영화에선 고삐리 정도면 남녀할 것없이 자신의 성욕을 자연스럽게 향유하며 그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똑같은 고삐린데 나라마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말하기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남고삐리들끼리는 바다를 건너서 공유되는 발기충천이 왜 여고삐리에게는 바다 저쪽에서만 나타나냔 말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여고삐리도 성욕을 갖고 있고 빠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며, 그것이 현실화될 경우 그 여고삐리를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신중절의 타이밍을 놓쳐 임신사실이 뽀록난 여고삐리를 자퇴나 전학의 형태로 학교 밖으로 내치는 것처럼 말이다.



여고삐리들의 성적(혹은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행위에 대해 남고삐리보다 더 강한 통제와 규율이 가해지는 경향은, 흔히 그녀들을 다양한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되고 그로인해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조치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남고삐리들의 경우 위생상의 조언이나 학업상의 이유, 혹은 범죄 예방 차원의 제제가 아니라면 그들의 폭주하는 꼴림에 거의 아무런 통제도 가해지지 않는다. 매춘부와 관계하면 성병에 걸리기 쉽다, 지나치게 빠굴만 생각하면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남자는 세가지 ‘끝’을 조심하지 않으면 인생 조지기 쉽다며, 그들의 선생과 애비와 선배는 충고하지만, 고삐리 정도면 여물데 다 여물었기 때문에 그들의 꼴림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긴다. 한국에서 남고삐리와 여고삐리의 성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남고삐리인 당신이 오늘도 변함없이 뽀르노 싸이트를 돌아댕기며 수작업에 여념이 없는 걸 애비가 봤다고 치자. 말이 통하는 애비라면 적당히 하라는 충고와 함께 ꡐ우리 아들도 이젠 다 컸구나ꡑ 감동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말이 통하는 애미가 그 광경을 봤다면 일단은 문을 닫아주고 나중에 조용히 불러다가 ꡒ양말은 빨아놓은 걸로 사용해라ꡓ같은 위생에 관한 조언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만한 조선의 딸이 ꡒ섹스 아카데미ꡓ의 제이니처럼 ꡒ쉬즈 올 댓ꡓ을 보며 아침부터 바이브레이터를 돌려댄다면 애미애비가 퍽도 좋아하겠다. 그러고보면 한국 영화에 나타난 그 명백한 차이는 남고삐리/여고삐리의 꼴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허용 정도를 정확히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남고삐리와 달리 한국의 정상적인 여고삐리는 정말 빠굴과 전혀 관련없이 사는 족속들일까? 영화는 현실속 여고삐리의 빠굴라이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니들도 대충 짐작하겠지만, 16~18세 여고삐리의 빠굴라이프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한국 영화 속 묘사는 순 개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2000년 하반기에 전국 고교생 2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고삐리의 16.5%가 애무를, 8.1%가 빠굴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98년 청소년 보호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문고 여고삐리 5.1%, 실업고 여고삐리 21.6%가 ꡐ자발적으로ꡑ 바꿀을 한 경험이 있으며, 97년에 대한가족협회에서 조사한 자료에는 여고삐리의 15.2%가 자위행위를, 7.5%가 (강요나 성폭력에 의한 것이 아닌) 빠굴을 해봤다고 나와 있다. 그 밖의 여러 통계치마다 정확한 수치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97년에서 2000년 사이에 적게는 5.4%에서 많게는 10.2%에 이르는 여고삐리가 실제 빠굴의 경험이 있다고 밝혔으며, 니들도 동의하겠지만, 2002년도에는 이보다 더 많은 빠굴 여고삐리가 있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 한 반 인원을 40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한 반에 여덟 명 정도는 키쓰를 비롯한 다양한 애무를 시도해봤으며, 세 네 명 정도는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빠굴을 해 본 적이 있었다는 얘기다, 2~5년 전에 이미! 한편 같은 기간 남고삐리의 경우에는 13~17.7%가 빠굴경험이 있으며, 대한가족계획협회가 96,97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빠굴 경험이 있는 15~19세의 남자 청소년 중 44%가 매춘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남고삐리들이 여고삐리보다 7~8%정도 빠굴경험이 더 많긴 하지만 여고삐리들도 적지 않은 수가 빠굴 혹은 그 전초전의 경험이 있다.  



물론 영화가 통계적으로 엄밀하게 현실을 반영해야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본 우원이 한국 영화에 여고삐리의 빠굴라이뿌가 순 개뻥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지랄지랄하는 이유는, 한국 영화의 그런 경향이 남성과 여성의 꼴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가치관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ꡐ여성의 꼴림은 죄악이다. 숫컷의 꼴림은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매춘은 필요악이다, 매춘부는 가부장적 폭력의 희생양이지만 동시에 도덕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ꡑ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이중잣대는 시대착오적인 망발이다. 그리고 그런 편견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난 9월 24일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표한 성범죄자 671명 중 16세 이상의 청소년을 성매매한 74명에 대해 ‘불경한’ 동정심이 생길 수도 있다.



(앞으로 할 얘기가 얘기니 만큼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가지 밝혀둘 것들이 있다. 본 우원이 앞으로 할 얘기는 강간, 성매매알선, 강제추행 등의 성범죄자들이 아니라 원조교제를 포함한 청소년 성매매자만을 다룬다. 그것도 16~18세에 해당하는 고삐리를 상대로한 성매매자말이다. 왜 하필 16~18세냐하면, 우선 그것은 고삐리들의 연령이고, 16세는 우리나라 외의 다른 나라들에서 일반적으로 의제강간 기준 연령-그 이하의 연령대의 미성년자와 빠굴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형사처벌되는 빠굴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있는 나이며, 18세는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청소년성보호법-에 의해 보호받는 최고연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들이 앞으로 읽을 본 우원의 글에서 청소년이나 미성년자라 함은 주로 16~18세의 고삐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쓸데없는 시비를 걸지 말기 바란다.)



청소년성보호법은 사실 ‘여자’청소년성보호법이다. 청소년성보호법에 근거를 두고 시행된 제3차 신상공개에는 17세 남자 청소년을 성매수한 30세의 아낙네가 포함되어 있긴하다. 하지만 그녀는 전체 성매수범 178명 중 유일한 여성이고 동시에 전체 671명 중 남자청소년을 법죄대상으로 삼은 유일한 케이스다. 앞서 살펴본대로, 남자빠굴청소년이 여자빠굴청소년보다 1.5~2배 정도 많은데도 전체 성범죄 대상자 비율은 오히려 여자청소년쪽이 670배나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남자청소년과 성인여성이 관계된 성범죄적 상황에서 남자청소년이 희생자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빠굴을 했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왕재수좋은 사건이지 인생 조뙨 사건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앞서 통계에 나타나듯이 빠굴 남자 청소년의 40% 이상은 그들이 직접 빠굴경험을 하기 위해 구매자로서 매춘여성을 찾아간다. 요컨대 청소년성보호법은 남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매매 범죄도 동일한 처벌대상으로 규정ꡓ하고 있지만, 여자청소년의 경우와는 달리 빠굴상황에서 남자청소년이 희생자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결국 ‘여자’청소년성보호법이라는 얘기다.



어쨌거나 여자청소년이 성적 착취의 희생자인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므로, 사문화된 윤락행위방지법을 대신하여 ‘여자’청소년성보호법을 제정해야한다는 취지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청소년성보호법과 그에 근거한 성범죄자 신상공개라는 제도는 ‘여자청소년의 성은 여성 일반의 성보다 더 보호할 가치가 있고 남자청소년의 성보다 더 통제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는 가치판단 하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앞서 ‘한국 영화에서 여고삐리의 빠굴이 묘사되는 방식이 한국영화의 다른 두 가지 경향과 대비된다’는 본 우원의 주장을 놀랍게도 현실속에서 재현하고 있기도 하다! 까먹었을 니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한국 영화의 그 두 가지 경향이란, 첫째 정상적인 여고삐리는 빠굴에 관심이 없거나 빠굴을 혐오하는 반면, 남고삐리는 통제불가능한 빠굴의지를 갖고 있고, 둘째, 온실의 화초처럼 안전한 여고삐리들과 달리 성인 여성들은 가혹한 성적 폭력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청소년성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네 가지 방식의 매매춘 행위(미성년남:성인녀, 미성년남:미성년녀, 성인남:성인녀, 성인남:미성년녀)중 현실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성인남:미성년녀의 경우 뿐이다. 즉 남자청소년의 (사는 행위로서의) 매매춘은 올웨이즈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성차별/연령차별적인 처벌방식이 타당하려면, 행위무능력자로서의 미성년자라는 연령적 고려 이외에, 남자청소년의 꼴림은 신체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고 이성적 판단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압도적이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성인남자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성욕을 가진 여자청소년의 경우와 달리, 통제와 교화의 대상이 안된다는 가정까지 동의해야한다. 한국영화에서처럼 남자고삐리의 (사는 행위로서의)빠굴은 통제할 수도, 통제할 필요도 없는 무소불위의 본능적 행위지만, 여고삐리의 (파는 행위로서의)빠굴은 예외적인 탈선이기 때문에 통제/관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청소년성보호법은 청소년의 성을 사는 행위에 대한 법률이지 청소년이 성을 사는 행위에 관한 법률이 아니므로, 성을 사는 행위의 ‘주체’일 경우는 종종 있지만 성을 사는 행위의 ‘객체’가 될 일은 거의 없는 남자청소년은 애시당초 이 법률이 개입하려는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성보호법 제1조대로 “청소년을 보호,구제하여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 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라면, 남자고삐리들이 성인 여성이나 여자청소년의 성을 사는 것은 그들이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데 별 지장없는 사건이란 말인가? 물론이다! 대한민국같은 마초사회에서 불알 꽉찬 사내놈이 창녀 한 번 안사봤다면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한편 청소년성보호법과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는 성인 매춘여성을 애용하는 숫컷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부여하는 희한한 결과를 초래한다. 실효성있는 성매매 관련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자청소년 성보호만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제정된 것은 그들에게 강력한 변명거리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법적 처벌의 대상은 아니잖아?” 라며,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을지도 모를 정치적, 도덕적 죄책감을 한방에 날려버린 매춘 빠굴남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결국 청소년성보호법은 성인 매춘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력에 어떤 방식으로든 손을 들어준 것이고, 이 또한 한국 영화에서 여고삐리 이외의 여성들이 자주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향과 유사하다.



매춘행위를 성토하고 있는 듯한 주장을 계속 하고 있지만 사실 본 우원은 매춘을 포함한 상업적 섹스 서비스가 필요악이라고 보지 않는다. 섹스 서비스는 필요지 필요악이 아니란 말이다. 성적 쾌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상업적 서비스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걸 이용하거나 그런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그 자체로 왜 나쁘단 말인가? 정말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세상은 남자들만큼이나 여자들도 자신의 성욕에 당당하고, 지금의 남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여성들도 자유롭게 섹스 서비스를 이용하며 그로부터 사는 보람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지, 결혼증명서나 혼인서약서를 지참한 자에 한해서 배란기에만 빠굴할 자격이 주어지는 그런 우끼는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A.I"에서 주드 로가 연기했던 지골로 로봇처럼 여성 고객이 원하는 로맨틱 무드와 감미로운 섹스를 제공해주는 그런 서비스를 여성들도 죄책감이나 수치심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안그래?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능한' 세계일 뿐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올해 1월 군산 개복동에서처럼 이중잠금키로 가둬놓은채 매춘행위를 강요하고 급기야 산채로 태워죽이기까지하는 이따위 야만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속에서 "섹스 산업은 필요악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의 정액 한 방울은 매춘여성의 피 한 양동이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씨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착취와 폭력 위에서 운영되는 매춘 산업에 당신이 돈을 뿌려댄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에 공범으로 가담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도 성인 여성에 대한 성매매는 사회적으로 묵인되고 있고 이와는 달리 청소년 성매매만이 강력한 처벌의 대상이다. 결국 청소년 성매매는 성인 여성 성매매와도 비교가 안될만큼 더욱 파렴치한 범죄행위란 말인가? 별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청소년 매매춘의 대표적인 형태인 원조교제와 일반적인 매춘행위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윤락행위에 관한 법률상 정의를 볼 때, 원조교제도 명백한 매춘행위다. 하지만 원조교제는 일반적인 매매춘과 몇가지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원조교제를 하는 여자청소년의 경우 직업적 매춘여성과 달리 상대를 선택할 수 있고 화대에 대한 교섭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포주에 의한 인신구속이나 폭행의 가능성도 없다. 거래에 이상이 있을 경우 상대적으로 성인 남자가 입는 사회적 타격이 크기 때문에 성인 남자와의 관계를 협상하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원조교제를 하는 여자청소년이 직업적 매춘여성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보기 힘들다. 한편 원조교제를 하는 여성이 청소년이라는 점을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인에 비해 판단능력이나 사고능력, 이해능력이 떨어지는,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상대로 성매매를 했기 때문에 원조교제가 성인 매춘여성에 대한 성매매보다 더욱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간한 연구 자료는 “십대 초반의 청소년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고능력, 이해능력, 그리고 판단능력들에서 확실히 성인에 비하여 열등하지만, 십대 중반 이후의 청소년들은 이 모든 요소들에서 성인수준의 성숙도를 갖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다시말해 10대 후반의 여고삐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아니며, 따라서 단지 18세 이하의 청소년을 성매매했기 때문에 성인 여성에 대한 성매매보다 더 파렴치한 행위라고 보기도 힘들다는 얘기다.



지난 9월에 청소년보호위원회가 공개한 671명의 청소년 성범죄자 명단에는 16~18세의 여자 청소년을 성매매한 73명의 성인 남자와 17세의 남자 청소년을 성매매한 1명의 성인 여성이 포함되어 있다. 공개된 범죄사실만으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원조교제를 통해 이루어진 성매매일 것이다. 이들의 청소년 성매매 행위가 다른 파렴치범들과 같은 명단에 오를만큼 극악한 죄질을 갖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18세 청소년과 단 1회의 성매매를 한 서울의 신모씨가 9세 여아를 강간미수,살해,사체유기한 인천의 곽모씨와 동일한 명단에 오르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어쨌든 청소년 성매매는 막아야하니까 명단공개는 불가피하다 치자. 그렇다면 16~18세 여자 청소년에 대한 평균 4회 미만의 성매매 행위가, 한국의 성인남자 상당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고 있는 성인 여성에 대한 매매춘보다 더 파렴치하고 극악한 죄라는 말인가? 성인 매춘 여성들은 산채로 불에 타죽든 말든 방관한 채 여고삐리들의 순결만 악착같이 보호해주면 된단 말인가? 왜, 그녀들은 단지 창녀일 뿐이까?



물론 청소년 성매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행위다. 청소년 성매매의 상당수는 매춘지역에서 산업적인 매춘 행태로 이루어지고 있고, 성매매를 경험한 많은 청소년들은 신체적,정서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성보호법의 제정과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환영할만한 제도다. 그러나 명단에 포함된 성매매자들 중 몇몇은 한국 성인 남자, 심지어 일부 남자 청소년 사회에서 일상화되어 있는, 성인 여성을 상대로한 매매춘 행위들보다 더 나쁜 죄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저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지만 당신중 일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니는 오입질도 충분히 저들의 행위만큼 나쁜 죄질일 수 있단 얘기다. 여고삐리의 성은 성인 여성의 성보다 더욱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남자의 성욕은 통제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춘행위는 필요악이라는, 이따위 헛소리가 통용되는 현실이 당신중 일부한테는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명단에 오른 74명의 입장에선 억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할 법하지 않은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본 우원, "걸스 온 탑"처럼 꼴림에 온몸을 배배꼬는 여고삐리가 등장하는 한국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소박한 바램은 물론 본 우원의 롤리타 콤플렉스 때문이지만, 한편으론 그런 영화를 극장에서 범죄의식이나 죄책감없이 볼 수 있을만큼,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이 드물고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데 자유로운 그런 사회가 얼렁 왔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기도 하다. 어때, 너네들도 그런 영화 보고 싶지?






p.s. 본  우원이 참고한 자료들이 궁금하면 여길 눌러보시라.




1. 철학과현실, 10대의 성은 왜 '보호'의 대상인가?, 2002년, 가을호

2. 당대비평, 누가,어떻게 '성 매매'를 바라보는가?, 2002년, 봄호

3. 이성숙,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

4. 남미애,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연구, 2001

http://dju.ac.kr/~kwonhb/papers/selfdet.htm

5. 박광배, 아동,청소년의 성적 행위결정 능력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 청소년보호위원회, 2000 (청소년보호위원회 홈페이지 http://www.youth.go.kr/ 자료실에 가면 다운 받을 수 있다.)

6. 김시업, 청소년의 '원조교제'와 '매춘'에 관한 심리학적 근거에 관한 연구, 청소년 보호위원회, 2000 (이것도...)

7. 국내 중고생 성의식과 성교육 실태 조사결과, 시사저널 20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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