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ir Witch Project, The
Daniel Myrick Eduardo Sánchez (II)  1999  
imdb

[학교신문 1999년 11월 19일 제 146호에 실은 글입니다... ]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일반적인 영화들은 그 영화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이 실재(reality)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자본을 쏟아 붓는다. 눈앞에서 달리고 있는 공룡을 컴퓨터 그래픽에 불과한 거짓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두시간 동안의 재미를 위해 미필적 고의(?)를 행할 것인가는 최종적으로 관객의 선택이지만, 제작사나 감독으로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다행히 요즘엔 영화기술의 발달 덕분에 그들의 노력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보통은 성공적이기 마련이고,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 비싼 '거짓'을 믿기로 작정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재미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완벽한 초실재(hyperreality)에서 료타르가 말하던 '숭고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블록버스터의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마술의 경우도 비슷하다. 마술이 재미있는 건 그것이 단순히 숙련된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어떤 정교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즉 "믿으면 더 재밌지만 안 믿어도 재밌다"는 것이 '사기'를 본질로 하는 엔터테인먼트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블레어 윗치>는 뻔뻔한 영화이다. 왜냐하면 <블레어 윗치>는 이 영화의 공포를 즐기기 위해 극장에 찾아든 관객들에게 종교적인 통과의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믿으면 무서울 것이고, 안 믿으면 돈만 아까울 것이다." 이 영화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믿는, 혹은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굉장히 무섭다. 보이지도 않는 '그것'이 주는 공포!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의 광고카피- 가장 두려운 것은 당신의 상상력 -에 절절히 공감하며 구토를 유발할 것 같은 진한 공포를 즐길 수 있다. 반면 이 영화가 조잡한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거대한 넌센스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5천원을 건지는 유일한 방법은 에두아르도 산체스와 다니엘 마이릭, 이 두 감독의 거짓말이 얼마나 진짜 같은지 비교, 분석하는 길뿐이다. 이 영화의 뻔뻔함은 여기에 있다. " 재밌으면 내 탓이요, 재미없으면 (안믿은) 니 탓이다."


진짜라고 생각하며 본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다큐멘터리(이하 다큐)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근사한 걸 보여줄 능력도 돈도 없는 감독들로서는, 다큐라면 일단은 진실성 혹은 사실성과 맞닿아 있을 것이라 믿는 순진한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는 참신한 것인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적어도 3개는 알고 있지 않은가? <카니발 홀로코스트1, 2, 3>. 사이비 다큐 형식으로 공포감을 유발하자는 이런 종류의 시도가 '허잡함의 본질'에 대한 많은 시사점만을 남겨두고 혹평 속에 사라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신인 감독들이 동일한 전략을 취하기로 작정한 것은 일종의 용기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용기의 결과는 어떠한가? 우선 이런 종류의 사이비 다큐의 한계로서 자명한대로, 이 영화는 어떠한 미학적 완성도도 보여주지 못한다. 따로 촬영감독도 두지 않고 연극하던 신인 배우 3명에게 직접 카메라를 맡겼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물론 허를 찌르는 극적인 반전 같은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다음의 단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정도이니까. "대학생 세 명이 마녀 다큐를 찍으려다 실종됐다. 아무래도 마녀 소행 같다." 결국 리얼한 공포를 묘사하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제외하곤 한마디로 한심할 뿐인 영화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키며 역대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인터넷을 통한 효과적인 마케팅이라 분석되고 있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것은 관객들의 상상력의 결과가 아닐까? 진짜 같은 가짜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가짜를 진짜처럼 여기는 데에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어진 사이버 시대의 젊은 관객들이 조잡할 뿐인 영화에 축복을 내려주고 재주 없는 감독들을 졸지에 돈방석 위에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관객들의 위치가 이전에 영화가 제공하는 이미지를 주는대로 소화해낼 뿐인 수동적인 '구경꾼'에서 없는 의미도 만들어내는 능동적인 '생산자'로 격상된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도된 웹 마케팅의 산물일 뿐이고, 그것이 어쩌다 관객들의 취향과 맞물려 분에 넘친 흥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를 가지고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영화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솔직한 심정인 것처럼 보인다. 블록버스터 한 편이 망하면 제작사도 휘청할 정도로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요즘의 추세이고 보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아이디어만 좋으면 떼돈이 들어올 수 있음을 증명해준 이 사례를 보고 어찌 '여차하면 망할 수도 있는 돈놓고 돈먹기'의 패러다임을 안 바꾸고 싶겠는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
이명세 1999  

[학교신문에 1999년 8월 27일 제 142호에 실은 글입니다...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외에는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는데다가, "첫사랑"에서 시작하여 "남자는 괴로워", "지독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흥행참패로 인해, 이명세의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든게 아닐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3년의 기다림 끝에 아마도 그의 영화이력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 기록될 "인정사정볼것없다"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명세는 욕심이 많은 감독이다. 그는 스필버그에 버금가는 흥행감독이 되고싶어하나 결코 자기 방식대로 영화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때때로 개인적 취향과 대중적 오락성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눈살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했었다. ("남자는 괴로워"에서의 극도로 유치했던 몇몇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번 영화 "인정사정볼것없다"를 보면, 그의 이 욕심많음이야말로 그의 영화세계를 독특하고 풍요롭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요컨대 그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형사물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 어두운 범죄의 분위기와 쫓고 쫓기는 자의 숨가뿜 속에서 뭉클한 페이소스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명세가 형사물, 그것도 액션이 주가 되는 형사물을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낯선 작업으로 생각되었다. 소시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이나 말단과장의 과로사, 혹은 사춘기 소녀의 가슴떨리는 사랑 얘기 같은 것들을 특유의 탐미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로 찍어내던 그이고 보니, 이건 마치 오우삼이 멜로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지 않는가? 하지만 결국 만들어진 영화는 여전히 "이명세적"이라 할만한, 이전의 액션영화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이 영화는 이야기구조가 굉장히 허술하다. 이 영화의 2/3이상은 쫓고 쫓기는 장면, 또 살인범을 기다리며 긴장에 떠는 장면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고, 때로 인과적 연결성이 부족한 듯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우형사가 장성민을 끝까지 쫓아다니다 결국엔 잡고야 만다"라는 한 문장으로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점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테러리스트"나 혹은 "더티해리" 그것도 아니면 "투캅스"류의 형사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어딘가 뒤틀려있고, 다소 조잡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이명세는 살인범이 얼마나 기발하게 형사를 속이고 도망가고 또 형사는 얼마나 영웅적으로 그를 쫓아가는가 하는 것을 통해 관객에게 재미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흔한 얘기이고 흔한 스타일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각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긴장감을 느끼는지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의 관심사는 인물이지 사건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얼마나 힘들게 달리는지(권용운을 쫓는 부두 씬), 혹은 살인범과 맞닥뜨리기 전의 긴장감이 얼마나 강렬한지(주연의 집에서의 잠복중 소변씬), 그런 것을 묘사하는 형사물을 이전에 본적이 있었던가? 치고받으며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왈츠같이 보여주는(짱구와 우형사의 옥상격투씬) 감수성을 갖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 외에 또 있을까? 요컨대 그의 영화 가운데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이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기교로 치장된 액션씬을 보여주고, 또 이전의 영화에서처럼 주인공들이 환상과 몽롱함 속에서 헤맨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여전히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의 이전 영화들과 많이 다른 부분들이 있다. "광장의 영화"를 찍으려 했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카메라는 이전 영화의 그 폐쇄적인 세트장을 벗어나 도로와 골목들을 질주하는 속도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적 공간은 온전히 그의 통제하에서 조작되고 꾸며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 영화와 이전 영화와의 단순한 연관성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영화적 공간엔 그의 환상과 정서가 담겨있다. 언제나 폴폴 수증기를 뿜어내며 끓고 있는 주전자가 있고 낡은 이발관에서 서머타임을 들으며 면도를 오후의 이발관 같은 한가함이 있고, 때로 물건이 날아다니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다. 사실 완벽히 감독의 통제하에 놓여있는 많은 영화적 공간이 있다. 팀 버튼의 괴기스러운 공간이 있는가 하면, 얀초의 나라라 할만한 혁명과 의지의 공간이 있다. 이명세의 공간은? 그곳엔 인간에 대한 긍정과 향수와 애틋함이 있지만, 어떤 현실감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우디 알렌과 채플린만이 진정한 천재라고 생각한다는 이명세는 그들의 유머속에 들어있는 날카로운 현실의식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은 사랑이나 연민같은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고 남다른 즐거움을 주지만 그런 즐거움은 단지 환상 속의 공간에서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うなぎ 우나기 ★★★★
今村昌平 1996
imdb

[학교신문에 1999년 6월 4일 제141호에 실은 글입니다... ]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는 이전에 개봉된 두 편의 일본영화들에 비해서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난폭한 형사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도 없고 화면을 가득 메우는 사무라이들의 스펙터클도 없다. 이 영화의 로맨스라는 것도 이와이 순지의 영화의 그것과 비교하면 무덤덤하기만 하다. 일본영화이기 때문에 부여되던 심리적인 가산점도 더 이상은 무효한 이때,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에 안성맞춤인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녕 볼 이유가 없는 영화인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6,70년대를 일관적인 전투적 자세로 영화를 찍어온 감독이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치부와 그 속에 내재된 파시즘, 그리고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역겨울 정도로 즉물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고발하였다. 그러던 그가 8년만에 다시 찍은 영화가 난데없이 이다지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인 것이다. 역사성이란 것이 전혀 없었던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차치하고라도, 2,30대의 청년기에 가장 예리한 진보적 좌파영화작가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파시즘과 혁명을 말하던 베르톨루치가 40대 이후부터 어떤 영화들을 찍고 있는지 기억해본다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의 이 돌연한 변화는 변질, 순응, 포기 등의 의혹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럴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선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영화는 아내의 불륜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출역후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살면서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가에 관한 영화이다. 다시말하면 치유에 관한 영화이지 속죄에 관한 영화는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과 더불어 앞으로 잘 살아나가는 것이지 그의 현재의 행동방식이 옳은가 틀린가에 대한 소모적인 고민이나 과거의 잘못을 되돌이키기 위한 자기학대가 아니다. 이 낯선 일본 노감독의 평범해보이는 영화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60년대 유럽혁명의 패배에 좌절하고 오리엔트의 엑조티즘에 경도된 베르톨루치의 아름답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는 달리, 이마무라의 '우나기'는, 새로운 시대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폭력과 착취의 사회구조하에서 한 개인이 자유로움과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길은 '타인과의 교감'이라는, 대가다운 연륜에서 나온 교훈을 제시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영화적 변화를 시대정신의 무뎌짐이나 현실감각의 상실 등으로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와같은 변화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기까지한 인간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관심과 그 시선의 따뜻함 때문일 것이다.

한편 '우나기'는 일견 단순해보이는 갈등과 사건들 속에 다른 대부분의 뛰어난 작품들처럼, 쉽게 해석됨을 허락하지 않는 난해함과 다의성을 갖고 있다. ( 동시에 그것이 전혀 현학적이거나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 즉, 서술상의 의도적인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실제로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초반부의 내러티브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어쩌면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임포턴트인 주인공 자신의 강박관념에 의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때의 뱀장어는 주인공의 자폐성의 상징이 아니라 억눌린 성욕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고, 이 영 화는 앞서 서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 또한 이 영화에는 내내 미소짓게 만드는 잔잔한 유머와 야쿠쇼 코우지의 뛰어난 연기가 있어 영화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감각만 있고 사유는 없는, 예컨대 이와이 순지의 영화가 사랑받고 있는 요즘의 경향에서 한걸음 비켜나있는 영화인 탓에 엄청난 흥행은 못했지만, 그런 결과가 다소 유감스러운 영화이다. 뛰어난 상상력과 세련된 이미지로 무장한 재미있는 영화는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연륜에서 나온 지혜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따뜻함이 담겨있는 영화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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